종교/묵상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대운하와 실용주의 비판)

그린빌나 2008. 4. 30. 12:30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대운하와 실용주의 비판)

1. 나그넷길에서 대화.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맥없이 돌아가시자 실망한 나머지 예루살렘에서 나와 고향 엠마오로 돌아간다.
이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한 인생만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우리 사회는 지금 어디를 향하여 길을 가고 있는가?
우리는 인생길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한다.
교육에 대해서, 경제에 대해서, 대운하에 대해서.
우리를 행복하게 할 것들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한다.
예수님을 잃고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 엠마오로 돌아가는 두 제자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길을 가면서 최근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들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나자렛 출신 예수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은 온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그분을 예언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구세주로 기대하였다.
그런데 그분은 대사제들과 지도자들에게 붙잡혀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말았다.
그분은 그들을 실망시켰다.
죽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긴 하였지만 그것이 그들의 실망스런 마음을 치유해주지 못한다.
그들은 여느 사람처럼 그분의 부활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면서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러는 사이 웬 낯선 사람이 끼어든다.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말을 건넨다.
루카는 그 낯선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한다.
그런 그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대화를 나눈다.(루카 24, 13-24)
불과 사흘 전에 헤어진 스승과 대화를 나누며 함께 걸어가면서도 그분을 알아채지 못하다니, 이게 가능한 일인가?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곧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다.
우리도 그들처럼 그렇게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우리도 일상에서 예수님을 두고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들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시라고, 그분은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고 그분의 부활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부활하시어 늘 우리 가운데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그런데 하느님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들처럼 우리도 우리 가운데 와 있는 그분을 느끼지 못한다.
왜일까?
그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도 그분을 느끼지 못하는 일이 어찌 일어나는 것일까?
루카는 이야기한다.
그들의 눈이 가리어 있기 때문이다. (루카 24, 16)
눈에 뭔가가 씌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무엇이 그들의 눈을 가리는가?
베드로 첫째 편지에서 암시를 얻을 수 있다.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 방식에서 해방되었는데, 은이나 금처럼 없어질 물건으로 그리된 것이 아니라, 흠 없고 티 없는 어린 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그리된 것입니다.”(1 베드 1,18-19)
옛 생활방식에 묶여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를 해방시켰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한다.
옛 생활방식에 묶여 있다는 것은 은이랑 금이란 없어지는 물건에 묶여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지금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은이나 금처럼 없어질 물건에 집착한 옛 생활방식으로 말미암아 눈이 가리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심이 온통 그런 것에 묶여 있으니 예수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당신의 몸을 쪼갰다느니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렸다느니 하는 것은 하나의 이상처럼 들리는 것이다.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다는 것은 그렇게 옛 습성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십자가에 처형된 주님이 그들의 삶에 실용적인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자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난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지금 우리사회의 관심사는 온통 실용적으로 얻을 수 있는 금과 은, 아파트와 경제, 부자가 되는 것으로 가득하다.
부자가 되는 것이, 힘을 키우는 것이, 명예를 쌓는 것이, 인기를 얻는 것이 행복의 절대가치처럼 여기고 있다.
경제성장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이 나라를 살리고 이 민족이 선진국에 들어서게 하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는 동안 잃게 되는 더 큰 가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새 정부가 집권하자 실용주의를 외치면서 친미든 친일이든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것이면 다 좋다는 변을 내놓고 있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면 무슨 짓을 다 해도 좋다, 돈만 벌면 된다는 식이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이들은 이 논리에 따라 대운하 계획을 추진한다.
자연이야 찢어지든 말든 환경이야 파괴되고 더럽혀지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는다.
눈앞의 이익이 중요하다.
자연을 찢고 환경을 파괴하는 것은 결국 하느님을 찢고 인간을 파괴하는 일이지만 눈이 가리어 이것이 보이지 않는다.
실용주의를 내세우는 사람들이 말하는 국익이란 가진 자를 더 가지게 하는 것 외에 다름이 아니다.
자기가 사는 환경을 파괴하면서 함께 사는 동료인 남에게 베풀 줄 모르는 부자가 모여 사는 곳이 선진국이 아니다.
거짓말을 해도 좋다, 속여먹어도 좋다, 돈만 벌고 높은 자리만 차지하면 된다는 식의 사고를 가진 실용주의자들이 모인 곳에는 언제든 사람을 배반할 마음이 도사리고 있다.
대다수의 국민들, 대다수의 그의 추종자들까지도 대운하를 반대하는 경향이 있자 이들은 대운하에 대한 이야기를 총선 이후로 미룬다.
총선이 끝나면 다시 이 이야기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 밀어붙이겠다는 계산이다.
제자들도 실용주의적으로 주님을 따랐던 것인가?
십자가에 처형당한 그분이 그들의 삶에 무슨 실용적인 도움을 주겠는가?
실용주의에 눈이 먼 그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다가와서 그들과 함께 길을 걸어가 주시는데도 주님을 느끼지 못한다.
아, 어리석은 자들이여! 언제 그들은 주님을 볼 수 있을까?
언제 그들은 함께 길을 가시는 주님을 느낄 수 있을까?
예언자들이 말한 것을 마음으로 믿는 날이 올까? (24,25)
예수님의 한탄이다.

2. 순롓길에서 대화.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살며시 다가가서 당신의 삶을 들려주신다.
그리스도는 반드시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설명해 주신다.(24,26-27)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있을 때 이미 여러 차례 들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인가? 그들이 길에서 나눈 이야기의 방향도 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해서이다.
인생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그들은(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들에 관하여 이야기한다고, 이것들을 믿는다고 입으로 고백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느낌이 없는 그런 믿음이 인생에 무슨 소용 있겠는가?
어떻게 인생에서 예수님을 느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을까?
무엇이 우리의 이  둔함을 치유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그들의(우리의) 둔한 마음을 치유해주실 수 있을까?
이 치유의 순간을 루카는 이렇게 서술한다.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24,28-31)
두 제자들은 길을 더 가려는 낯선 사람을 붙들어 만찬에 초대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만찬장에 초대된 이는 그 낯선 분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다.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신다.
이로써 예수님은 당신이 잡히시던 날 밤 저 예루살렘에서 에 일어났던 일, 최후의 만찬 때의 일을 상기시키신다.
비로소 그들은 낯선 그분이 곧 예수님임을 알아채게 된다.
빵을 쪼개는 일은 곧 자기를 쪼개는 일, 자기를 희생하는 일이다.
그렇다. 제자들이 그때까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자기를 쪼개는 일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남을 위하여 피 한 방울 흘리는 일을 마다하였기 때문이다.
자기 몸 상하지 않고 (자기 몸을 쪼갠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자기 피를 흘리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것만을 (그러니 남을 위하여 피를 흘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실용에 젖어 희생에, 자기의 몸을 쪼개는 일에 둔하였던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주님은 당신 몸을 쪼개는 일을 보여 주신다.
그리고 쪼개는 일에 찬미와 감사를 드린다.
그들의 눈이 뜨이기 시작하면서 그들이 걸어온 길이 보인다.
인생의 방향을 잘못 잡았음을 깨닫는다.
인생 순례의 목표는 엠마오가 아니라 최후의 만찬이 열리고 십자가가 높이 세워진 예루살렘임을.
인생의 목표가 예루살렘이라는 것이 분명해지면서 그들은 인생은 깨닫게 된다.
나그넷길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순례길이라는 것을 또한 깨닫게 된다.
남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 몸을 쪼개는 것이 우리 인생이 도달해야 할 목표임을.
인생은 자기희생 없이는 걸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어 그분의 희생으로부터 도망쳤던 그들의 마음이 부끄러움으로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예수님은 그렇게 엠마오로 향하던 그들의 나그넷길을 예루살렘으로 향한 순례길로 바꾸어 주시면서 그 둔한 마음을 고쳐주신다.
그리고 당신의 현존을 느끼게 해주신다.

제자들을 일깨워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한 그 미사를 그리스도인은 매일 드린다.
그리고 빵을 먹는다.
빵을 먹는 것은 나도 예수님처럼 남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을 쪼개어 남에게 주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남을 위해 내 피를 흘리기 위해서이다.
내가 희생되지 않기 위해서 남을 희생시키고, 남을 쪼개어 내 실속만을 챙기려든 내 몸을 이제는 쪼개어 남을 살리기 위해서이다.
이 미사에는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지, 우리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 하는 것이 여실히 표현되어 있다. 우리 인생의 목표는 남을 살리고 그렇게 사회를 살리기 위해 내 몸을 쪼개는데 있다.
우리는 자기를 쪼개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안다.
우리의 눈이 가리어 있기 때문이다.
멀리 볼 거 없다.
마산의 수정마을이 지금 수난을 당하고 있다.
조용하던 마을에 마산시가 조선소를 끌어들이면서 불화가 시작되었다.
마산시는 실용을 외치면서 마산의 경제회복을 위하여 수정 마을 주민이 희생하라고 호소한다.
그들은 수정 마을 주민이 한발자국만 뒤로 물러나 희생하면 마산의 경제가 회복될 것인데 수정 주민을 자기들이 희생하려 들지 않고 이기적으로 군다고 몰아 부친다.
그런데 가난한 수정 마을 주민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그들은 이들 주민을 위하여 단돈 한 푼도 희생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결코 그러지 못한다.
자기의 소유와 가정을 희생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은 마산의 경제회복이라는 구호를 걸어 가난하고 힘없는 자를 희생시켜 가진 자기의 배를 더 불리고자 하는 것이다.
부익부 빈익빈.
이것이 이 정부가 주장하는 실용주의의 실체이다.
없는 이를 희생시켜 더욱 부자가 되는 실용주의의 실체이다.

3. 타오르는 마음.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실용주의를 외치는 우리 사회는, 우리나라는 지금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는가?
길을 가면서 우리 모두는 행복을 추구한다.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순례의 길을 걸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순례의 길을 걸어야 한다.
우리 인생의 순례길이 도달할 목표는 엠마오가 아니라 자기의 희생을 요구하는 예루살렘이다.
자기의 안전과 이익을 도모하는 실용주의적인 사고방식이 우리의 눈을 가린다.
눈을 떠라.
눈을 뜨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 몸을 쪼개야 한다.
빵을 떼어 나누어 주는 일은 예수님의 일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일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자기의 실용이 아니라 남을 살리기위한 자기희생과 이런 봉사를 필요로 하고 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에게 가까이 다가가신 예수님은 지금 그들에게(우리에게) 봉사와 희생을 일깨우며 우리의 눈을 뜨게 한다.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고서는 순례의 길을 갈 수 없다.(24,32)
출처 : 이재민신부님 홈피 빈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