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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마지막 날`...아빠는 외롭고 힘들다
그린빌나
2008. 10. 31. 17:34
10월의 마지막 날`...아빠는 외롭고 힘들다
헤럴드경제 | 기사입력 2008.10.31 16:33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 시월의 마지막 밤을….'
31일 아침, 경기도 한 신도시의 증권회사 지점장인 박해창(49)씨는 여느 때처럼 출근을 위해 버스를 탔다. 박씨의 귀에 낯익은 노래가 들려왔다.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었다. 1982년 가을, 제대하고 막 대학에 복학했던 박씨가 막걸리 집에서, 호프 집에서, 다방에서 즐겨듣던 노래였다. "맞아. 그때 막 통행금지가 사라졌었지."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는 않아도 젊음을 안주 삼아, 짝사랑하고 있던 과 후배를 추억 삼아 한 잔 두 잔을 비우다 보면 `젊음의 고민`을 잊을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서슬퍼런 군사 정권 시절이라 암울하기도 했지만, 경제가 호황이라 잘 될 거라는 희망이 박씨의 마음 속에 더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박씨는 요즘 들어 부쩍 외로움을 느낀다. 고객들의 돈을 관리해주다, 수탁고를 올리고 돈도 벌겠다는 목적에 손 댔던 주식과 펀드는 반토막이 났다. 이제는 제법 머리가 커진 고2 딸과 중2 아들은 아빠인 박씨를 상대해주지 않고 또래 친구들끼리만 어울리려 한다.
같이 입사했던 동기들 중 절반 가까이는 10년 전 `IMF` 때 자의반 타의반으로 회사 문을 나갔다. 그나마 남아 있던 이들 중 상당수도 자영업이나 제3 금융권 등 다른 살 길을 찾아 떠났다. 이제 남은 사람은 박씨를 포함해 네댓명.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 다른 일자리를 알아볼 생각도 해 보지만, 경기 불황 때문에 만만치가 않다.
"어렸을 땐 정말 잘 나갈 줄 알았는데…. 왜 계속 제자리야." 갑자기 우울해졌다. 부하 직원들하고 같이 밥 먹는 것도 싫었다. 일찍 나가서 인근 상가 분식점에서 간단히 순두부찌개로 점심을 들고, 마음을 풀 겸 인근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이른 낮이라 주위에는 모두 노인들뿐이었다. "나도 얼마 안 있음 저렇게 되겠지." 갑자기 손에서 힘이 쭉 빠졌다.
10월의 마지막날, 우리네 아빠들은 여전히 우울하다. 증시는 간만에 활짝 웃고 있지만, 여전히 앞날을 예측할 수 없다. 주식 펀드 부동산 등 '재테크 수단'들의 가치가 점점 하락하는 경제난이 아빠들의 마음을 옥죈다. '잊혀진 계절'을 들으며 꾸던 미래에 대한 희망은 노래 가사 대로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어서 더욱 슬프다.
40대 이상의 중년 아빠들은 경제난에 점점 두려운 마음만 더해간다. 들어가야 할 돈은 많지만 들어오는 돈은 정작 신통치 않다. 한창 공부하는 아이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심하게는 몇백만원의 사교육비를 대야 한다. 또 사회에서 뒤처지지 않고 윗사람에게 눈도장찍으려면 골프 같은 '사교성 레저'도 배워야 하지만 제대로 된 골프 클럽들을 마련하려면 또 몇백만원의 출혈이 불가피하다.
나이가 들면서 요즘 추위를 부쩍 타는 아내에게 제대로 된 겨울 코트 한 벌 선물해주고 싶지만 백화점 진열대에 붙은 가격표는 최소 0(영)이 5개인 몇십만원대. 게다가 회사에서 중간 간부급이라 저녁 때 후배들에게 술이라도 한 잔 사려고 치면, 아침부터 용돈을 타거나 카드 사용을 허락받느라고 '와이프'의 눈치까지 봐야 한다.
그러다 노래 '잊혀진 계절'과 같이 갑자기 다가오는 연례행사인 10월의 마지막밤이 되면 마음이 더 추워진다. 대기업 부장인 박모(45)씨는 "앞으로 이룰 수 있는 것보다 이룰 수 없는 것이,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이 더 많아진다는 생각이 들면 그냥 회사고 뭐고 내팽겨치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며 "하지만 내가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고, 직장이 있다. 옴싹달싹할 수 없는 현실이 괴롭다"고 말했다.
'10월의 마지막날'은 가을의 절정이다. 흔히 '여자는 봄, 남자는 가을을 탄다'는 말처럼 바람이 불고 단풍이 들고 낙엽이 떨어지면 남성들은 더 외로움을 느낀다고 한다.
김기성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중년이 되면 과거에 대한 추억이 짙어지지만 예전처럼 따라주지 않는 몸이나 돌아갈 수 없는 현실 등에 가로막히는 남성들이 '나도 아니 들었다'는 생각에 더 슬퍼지고 우울증 유병률도 높아진다"며 "호르몬 분비도 예전같지 않아지면서 몸의 신진대사도 원활하지 않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고 현실에서도 이룰 게 없어 일종의 공황장애가 올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남성은 생체시계가 가을에 맞춰져 있어, 신체리듬을 조절하는 멜라토닌이 왕성하게 분비돼 감정 변화가 심해진다고 한다. 의학계에선 우울증을 이기기 위해서는 운동이나 레저, 아니면 문화생활 등으로 여가를 즐겁게 보내는 것 제일 좋다고 충고한다.
그래서인지 올해 들어'시월의 마지막밤' 펼쳐지는 각종 공연들로 우울한 마음을 달래보려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네이버 다음 등 포털 사이트엔 '시월의 마지막밤' '10월의 마지막날 공연' 등 관련 단어들이 월요일부터 인기 검색어로 올라있는 상태다.
박씨도 모처럼 아내와 함께 오늘 오후 8시,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코리안심포니 정기연주회 '가을에 만나는 브람스'를 찾기로 했다. 집에 돌아가서는 얼마전 중간고사를 보느라 바빴던 막내 아들과 미국판 '시월의 마지막밤 축제'인 '할로윈데이' 파티를 하러 쿠키와 '할로윈데이'용 호박탈 풍선을 준비해뒀다. 풍선을 사는 박씨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그래, 11월에는 좋은 일이 있을거야. 어쩌면 박씨 인생에서 제일 힘들고 우울했던 '시월의 마지막 날'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31일 아침, 경기도 한 신도시의 증권회사 지점장인 박해창(49)씨는 여느 때처럼 출근을 위해 버스를 탔다. 박씨의 귀에 낯익은 노래가 들려왔다.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었다. 1982년 가을, 제대하고 막 대학에 복학했던 박씨가 막걸리 집에서, 호프 집에서, 다방에서 즐겨듣던 노래였다. "맞아. 그때 막 통행금지가 사라졌었지."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는 않아도 젊음을 안주 삼아, 짝사랑하고 있던 과 후배를 추억 삼아 한 잔 두 잔을 비우다 보면 `젊음의 고민`을 잊을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서슬퍼런 군사 정권 시절이라 암울하기도 했지만, 경제가 호황이라 잘 될 거라는 희망이 박씨의 마음 속에 더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박씨는 요즘 들어 부쩍 외로움을 느낀다. 고객들의 돈을 관리해주다, 수탁고를 올리고 돈도 벌겠다는 목적에 손 댔던 주식과 펀드는 반토막이 났다. 이제는 제법 머리가 커진 고2 딸과 중2 아들은 아빠인 박씨를 상대해주지 않고 또래 친구들끼리만 어울리려 한다.
같이 입사했던 동기들 중 절반 가까이는 10년 전 `IMF` 때 자의반 타의반으로 회사 문을 나갔다. 그나마 남아 있던 이들 중 상당수도 자영업이나 제3 금융권 등 다른 살 길을 찾아 떠났다. 이제 남은 사람은 박씨를 포함해 네댓명.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 다른 일자리를 알아볼 생각도 해 보지만, 경기 불황 때문에 만만치가 않다.
"어렸을 땐 정말 잘 나갈 줄 알았는데…. 왜 계속 제자리야." 갑자기 우울해졌다. 부하 직원들하고 같이 밥 먹는 것도 싫었다. 일찍 나가서 인근 상가 분식점에서 간단히 순두부찌개로 점심을 들고, 마음을 풀 겸 인근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이른 낮이라 주위에는 모두 노인들뿐이었다. "나도 얼마 안 있음 저렇게 되겠지." 갑자기 손에서 힘이 쭉 빠졌다.
10월의 마지막날, 우리네 아빠들은 여전히 우울하다. 증시는 간만에 활짝 웃고 있지만, 여전히 앞날을 예측할 수 없다. 주식 펀드 부동산 등 '재테크 수단'들의 가치가 점점 하락하는 경제난이 아빠들의 마음을 옥죈다. '잊혀진 계절'을 들으며 꾸던 미래에 대한 희망은 노래 가사 대로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어서 더욱 슬프다.
40대 이상의 중년 아빠들은 경제난에 점점 두려운 마음만 더해간다. 들어가야 할 돈은 많지만 들어오는 돈은 정작 신통치 않다. 한창 공부하는 아이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심하게는 몇백만원의 사교육비를 대야 한다. 또 사회에서 뒤처지지 않고 윗사람에게 눈도장찍으려면 골프 같은 '사교성 레저'도 배워야 하지만 제대로 된 골프 클럽들을 마련하려면 또 몇백만원의 출혈이 불가피하다.
나이가 들면서 요즘 추위를 부쩍 타는 아내에게 제대로 된 겨울 코트 한 벌 선물해주고 싶지만 백화점 진열대에 붙은 가격표는 최소 0(영)이 5개인 몇십만원대. 게다가 회사에서 중간 간부급이라 저녁 때 후배들에게 술이라도 한 잔 사려고 치면, 아침부터 용돈을 타거나 카드 사용을 허락받느라고 '와이프'의 눈치까지 봐야 한다.
그러다 노래 '잊혀진 계절'과 같이 갑자기 다가오는 연례행사인 10월의 마지막밤이 되면 마음이 더 추워진다. 대기업 부장인 박모(45)씨는 "앞으로 이룰 수 있는 것보다 이룰 수 없는 것이,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이 더 많아진다는 생각이 들면 그냥 회사고 뭐고 내팽겨치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며 "하지만 내가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고, 직장이 있다. 옴싹달싹할 수 없는 현실이 괴롭다"고 말했다.
'10월의 마지막날'은 가을의 절정이다. 흔히 '여자는 봄, 남자는 가을을 탄다'는 말처럼 바람이 불고 단풍이 들고 낙엽이 떨어지면 남성들은 더 외로움을 느낀다고 한다.
김기성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중년이 되면 과거에 대한 추억이 짙어지지만 예전처럼 따라주지 않는 몸이나 돌아갈 수 없는 현실 등에 가로막히는 남성들이 '나도 아니 들었다'는 생각에 더 슬퍼지고 우울증 유병률도 높아진다"며 "호르몬 분비도 예전같지 않아지면서 몸의 신진대사도 원활하지 않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고 현실에서도 이룰 게 없어 일종의 공황장애가 올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남성은 생체시계가 가을에 맞춰져 있어, 신체리듬을 조절하는 멜라토닌이 왕성하게 분비돼 감정 변화가 심해진다고 한다. 의학계에선 우울증을 이기기 위해서는 운동이나 레저, 아니면 문화생활 등으로 여가를 즐겁게 보내는 것 제일 좋다고 충고한다.
그래서인지 올해 들어'시월의 마지막밤' 펼쳐지는 각종 공연들로 우울한 마음을 달래보려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네이버 다음 등 포털 사이트엔 '시월의 마지막밤' '10월의 마지막날 공연' 등 관련 단어들이 월요일부터 인기 검색어로 올라있는 상태다.
박씨도 모처럼 아내와 함께 오늘 오후 8시,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코리안심포니 정기연주회 '가을에 만나는 브람스'를 찾기로 했다. 집에 돌아가서는 얼마전 중간고사를 보느라 바빴던 막내 아들과 미국판 '시월의 마지막밤 축제'인 '할로윈데이' 파티를 하러 쿠키와 '할로윈데이'용 호박탈 풍선을 준비해뒀다. 풍선을 사는 박씨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그래, 11월에는 좋은 일이 있을거야. 어쩌면 박씨 인생에서 제일 힘들고 우울했던 '시월의 마지막 날'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