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8주간 수요일(20101013)
유시찬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 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 율법 교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 |
다소 편안한 마음으로, 허나 결코 간단하지만은 않은 마음으로, 한 구절씩 짚어 가며 묵상을 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유익함이 있겠습니다. 그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마음과는 달리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엉뚱한 곳으로 흐르고 맙니다, 라고만 하고 있어서는 기도를 통한 힘찬 기운은 길어 올릴 수 없을 것입니다. 새로운 지평과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겉발림의 피상적 차원에 만족하는 사람이 어떻게 더 깊은 차원에 들어가서 새로운 맛을 보게 되는지 체험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앎이 훨씬 더 깊은 곳에 뿌리박고 서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살아가는 것입니다. 허나 그 기쁨이나 생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강한 것도 있음을 기도를 통해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한 수 처지는 기쁨이나 생명은 저절로 떨어져 나가지 않겠습니까. 있다면 예수님 생각처럼 살아내게 되겠지요. 그렇지 않다는 것은 우리의 앎이 지식 차원에 머물고 있으며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유시찬 신부(예수회) |
성당에서 십일조를 바치는 교우들을 아직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개신교 신자들은 십일조를 꼬박꼬박 바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성당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대체로 헌금 삼십일조, 자선 헌금 삼십일조, 교무금 삼십일조 등을 합쳐서 십일조를 낸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그러나 온전하게 삼십일조를 정말로 바치는 것인지도 조금은 회의가 듭니다.
주님께서는 십일조를 내고 경건하게 살아가며, 율법을 가르치기까지 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에게 책망을 하십니다.
사실 십일조를 바치는 행위 자체는 훌륭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비록 십일조를 바치고 교리를 가르친다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에 대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의로움은 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하는 행위이고, 사랑은 주님의 계명을 실행하는 행위입니다.
만일 우리가 십일조는커녕 삼십일조도 제대로 바치지 않으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마저 부족하다면 주님께 어떠한 책망을 받겠는지요? 난감합니다.
신앙생활은 돈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처지에서 최선을 다해 얼마만큼 주님께 의탁하고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지에 달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