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 넘어 한글 배운 수문댁
몇 날 지나자 도로 표지판쯤은 제법 읽었는데
자응 자응 했던 것을 장흥 장흥 읽게 되고 과냥 과냥 했던 것을
광양 광양 하게 되고 광주 광주 서울 서울 다 읽게 됐는데
새로 읽게 된 말이랑 이제껏 썼던 말이랑
통 달라서 말 따로 생각 따로 머리 속이 짜글짜글 했는데
자식 놈 전화 받을 때도 옴마 옴마 그래부렀냐?
하다가도 부렀다와 버렸다 사이에서 가새와 가위 사이에서 혀와 쎄가 엉켜서 말이 굳곤 하였는데
어느 날 변소
벽에 써진 말 수문 양반 왕자지 그 말 하나는 옳게 들어왔는데
그 낙서를 본 수문댁 입이 눈꼬리로 오르며
그람 그람 우리 수문 양반 왕자거튼 사람이었제 왕자거튼 사람이었제
* 쎄 : ‘혀’의 전라도 방언
이대흠 시인의 시다. 시인의 짓궂은 시선이 발견한 낙서 하나가
독자에게 유쾌한 선물을 던져준다. 이 시에 등장하는 수문 댁의 옆에 이미 수문 양반은 없다. 갑작스런 병을 얻어 예순에 채 이르지도 못하고
저세상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고된 삶을 이끌고 혼자 사는 수문댁은 먼저 간 남편을 원망하고 있을까? 아니다. 수문댁의 기억 속에 남편은
‘왕자거튼 사람’으로 오롯이 박혀 있다. ‘왕자거튼’이라는 말 속에는 지금은 옆에 남편을 향한 한없는 존경과 신뢰의 감정이 실려 있다. 그것은
수문댁으로 대표되는 이 땅의 농투사니들에 대한 시인의 애정의 표현이기도 하다.
-
안도현의 아침엽서에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