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연의 아침엽서

수문 양반 왕자지

그린빌나 2006. 4. 26. 16:35
수문 양반 왕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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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 넘어 한글 배운 수문댁
몇 날 지나자 도로 표지판쯤은 제법 읽었는데

자응 자응 했던 것을
장흥 장흥 읽게 되고
과냥 과냥 했던 것을
광양 광양 하게 되고
광주 광주 서울 서울
다 읽게 됐는데

새로 읽게 된 말이랑 이제껏 썼던 말이랑
통 달라서
말 따로 생각 따로 머리 속이 짜글짜글 했는데

자식 놈 전화 받을 때도
옴마 옴마 그래부렀냐? 하다가도
부렀다와 버렸다 사이에서
가새와 가위 사이에서
혀와 쎄가 엉켜서 말이 굳곤 하였는데

어느 날 변소 벽에 써진 말
수문 양반 왕자지
그 말 하나는 옳게 들어왔는데

그 낙서를 본 수문댁
입이 눈꼬리로 오르며
그람 그람 우리 수문 양반
왕자거튼 사람이었제
왕자거튼 사람이었제

* 쎄 : ‘혀’의 전라도 방언

이대흠 시인의 시다. 시인의 짓궂은 시선이 발견한 낙서 하나가 독자에게 유쾌한 선물을 던져준다. 이 시에 등장하는 수문 댁의 옆에 이미 수문 양반은 없다. 갑작스런 병을 얻어 예순에 채 이르지도 못하고 저세상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고된 삶을 이끌고 혼자 사는 수문댁은 먼저 간 남편을 원망하고 있을까? 아니다. 수문댁의 기억 속에 남편은 ‘왕자거튼 사람’으로 오롯이 박혀 있다. ‘왕자거튼’이라는 말 속에는 지금은 옆에 남편을 향한 한없는 존경과 신뢰의 감정이 실려 있다. 그것은 수문댁으로 대표되는 이 땅의 농투사니들에 대한 시인의 애정의 표현이기도 하다.

 

- 안도현의 아침엽서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