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
미 대북정책 '미묘한 변화'의 변화
그린빌나
2006. 5. 29. 16:42
미 대북정책 '미묘한 변화'의 변화 | |||||||||||||
핵포기와 수교 협상 ‘병행’ 추진 가능성 보여 | |||||||||||||
작년 9월부터 미국의 대북 금융제재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지난 2월 말 미국은 북한 인권법에 따라 탈북자 200명을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4월 27일 미 LA 이민법원이 한국 국적의 탈북자 서재석 씨의 정치적 망명을 받아들였고, 이튿날 부시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탈북자들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부시 2기 행정부의 출범 이후 협상파들이 나서 ‘9ㆍ19 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곧바로 금융제재가 가해지고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압박강도가 높아짐으로써 미국의 대북정책은 다시 강경파들의 손아귀로 넘어가지 않았나 하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미묘한 변화’가 있었던 미국의 대북정책이 또다시 변화하기 시작했다. ‘9ㆍ19 공동성명’ 이후 각종 현안들을 제기하며 북한을 압박하던 미국의 대북정책이 김정일 체제를 인정하면서 핵문제를 풀려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추진했던 군사외교정책들이 한계에 직면하면서 방향전환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첫 신호탄은 지난 5월 15일에 있었던 미국과 리비아 간의 완전한 국교 정상화이다. 리비아는 북한ㆍ이란ㆍ이라크ㆍ쿠바ㆍ시리아와 함께 불량국가로 규정됐었지만, 2003년 12월 핵무기 포기선언 이후 미국과의 관계개선이 진행돼 왔다. 이로써 ‘정권교체’ 없이도 핵문제를 해결한 선례를 만들어낸 것이다. 9ㆍ11 테러사태 이후 미국은 전쟁을 통해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인위적으로 정권교체를 실현시켰다. 하지만 정권교체의 결과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많은 비용이 들었을 뿐만 아니라 불완전한 것이었다. 오히려 부시 행정부의 지지율을 바닥으로 떨어뜨렸을 뿐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정권교체’와 ‘핵 문제해결’을 분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미국 내에서 높아지기 시작했다. 미국의 안전보장은 ‘평화협정’ 아닌
‘수교’로 6자회담에서 북한은 미국에게 양자대화를 통해 ‘북ㆍ미 평화협정’ 또는 ‘북ㆍ미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여 체제안전을 보장받고자 했다. 미국은 핵 문제 우선해결을 내세우며 ‘북ㆍ미 평화협정’의 논의 자체를 거부했지만, ‘9ㆍ19 공동성명’에서는 북한의 요구를 양자 차원의 ‘수교문제’와 한반도 차원의 ‘평화체제문제’로 분리 접근했다. 그리고 ‘북ㆍ미 수교’를 새로운 대북 안전보장 방식으로 제시했다. 그동안 북한이 ‘북ㆍ미 평화협정’을 고집했던 이유는 평화협정에 들어가게 될 ‘상호 주권존중’, ‘내정 불간섭’, ‘불가침 및 무력 불행사’, ‘분쟁의 평화적 해결’과 같은 안전보장 약속을 미국이 문서로 보장해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내용들은 ‘북ㆍ미 수교협정’을 통해서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다. 북한과 미국은 교전 당사자이기는 하나 북ㆍ미 간에 국경문제와 같이 복잡한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전쟁과 관련한 전쟁 책임문제나 배상문제를 이제 와서 거론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굳이 북ㆍ미 간에 ‘평화협정’ 없이 수교협정으로 대신할 수 있다. 다만 수교협정이 평화협정의 내용을 포괄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보완하기 위해 협정체결 이전에 ‘전쟁종결 선언’이 북ㆍ미 간에 별도로 필요하다. 이 같은 적용방식은 선례가 있다. 한국전쟁의 교전 당사자였던 한국과 중국이 ‘한ㆍ중 평화협정’을 맺지 않은 채 ‘한ㆍ중 수교 공동성명’(1992)에 서명하는 방식을 통해 관계정상화를 이루었다. 러시아와 일본도 ‘북방 4개 섬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평화협정을 체결하지 않았지만, 양국은 ‘소ㆍ일 공동선언’(1956)에 조인하여 전쟁상태를 종결시키고 국교를 회복하였다. ‘핵포기-수교 병행협의’ 위한 연락사무소
교환 미국은 ‘조건 없는 핵 포기’를 요구하며 북한을 압박했지만, 제4차 6자회담에서는 ‘핵 포기’와 ‘수교’를 연계시키는 구상을 내놓으면서 다소 유연한 자세를 취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선 핵 포기, 후 수교’라는 입장을 버리지는 않았다. 이에 대해 북한은 ‘동시행동’을 요구하며 강하게 반발했고, 미국은 위폐문제ㆍ인권문제를 들어 북한에게 압박을 가하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 핵 포기 협상과 수교 논의를 동시에 진행시킬 수 있다는 입장이 미국 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대북정책의 변화 조짐이 나타난 것은 지난 3월 7일 북ㆍ미의 뉴욕접촉 때부터이다. 이 자리에서 미국은 ‘6자회담의 틀 안에서’라는 단서를 붙이기는 했지만, 금융제재 문제이든 수교문제이든 양국 현안을 다룰 북ㆍ미 직접대화를 제안했다. 또 미 의회에서 짐 리치 미 하원 국제관계위 동ㆍ아태 소위 위원장이 북ㆍ미 직접대화, 평화체제, 북ㆍ미수교를 제안하고 나섰다. 5월에 들어서자 미국 내 움직임이 빨라졌다. 5월 4일 버시바우 주한 미대사는 “미국도 남북관계를 이해하는 방향으로 북한에 대한 관점을 바꿀 때가 됐다”고 밝혔다. 곧이어 북핵문제를 논의할 6자회담과 평화체제 문제를 논의할 ‘별도포럼’을 ‘병행’하여 개최할 수 있다는 ‘젤리코 보고서’의 내용이 흘러나왔다. ‘북ㆍ미 수교’와 관련해서도 미국은 두 가지 면에서 태도변화를 보여주었다. 하나는 ‘선 핵 포기, 후 수교’라는 입장에서 ‘핵 포기-수교 병행협의’로 태도를 전향적으로 바꾼 것이다. 다른 하나는 북ㆍ미 수교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미 의회가 법적으로 보장하겠다는 것이다. 미 의회, 핵 포기-수교 과정을 법적으로
보장 모든 현안들이 해결되어야만 북ㆍ미 수교가 가능하다고 미국측이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미 행정부는 위폐나 인권 문제 등에서 북측이 ‘일정한’ 성의를 보일 경우 먼저 워싱턴과 평양에 연락사무소를 개설하는 등 관계개선 조치를 취한 뒤, 북측이 현안문제 해결에 가시적인 성과가 있을 경우에 공식적인 국교수립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하지만 미 행정부가 북ㆍ미 관계의 정상화를 핵 포기의 대가로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수교가 이루어지기 위해 미 의회의 동의절차가 필요하다는 점은 또 다른 걸림돌로 작용한다. 미 행정부가 북한측과 관계정상화 약속을 했더라도 미 의회가 여러 가지 조건을 내걸어 동의하지 않으면 수교가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북한의 우려를 해소해 주기 위해 북한의 핵포기와 북ㆍ미수교를 연계시키는 법안을 만들려는 미 의회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우크라이나 핵문제의 평화적 해법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한 리처드 루거 미 상원 외교위원장이 그 대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북한관계법’(가칭)의 입법을 통해 북 핵 포기와 국교정상화 일정을 법적으로 규정한 ‘북핵 로드맵‘ 초안을 선보였다. 이 법안의 초안은 기본적으로 북한이 먼저 대량살상무기를 폐기하고 국제기구에 가입하는 것을 전제로 미국이 상응조치를 취하는 형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북한이 요구해 온 ‘동시행동’과도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미국측의 약속이행을 미 의회가 사전에 법으로 보장한다는 점에서 북한의 의구심을 제거해 줄 수 있다. 미국의 정책변화를 남북관계 돌파의 기회로
북한의 경수로 우선 요구와 미국의 위폐문제 제기에 걸려 벌써 8개월이 넘게 6자회담이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 바탕에는 북한과 미국 간의 ‘상호불신’이 깔려있다. 이러한 불신을 조금이나마 해소하려는 움직임이 최근 미국에서 나타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영어 속담에 “악마는 작은 문제에 숨어있다”(the devil is in the detail)는 말이 있다. 악마가 숨을 곳을 없애는 것이 상호 불신을 없애는 지름길이다. ‘9ㆍ19공동성명’이 북핵문제 해법의 큰 틀을 제시한 것이라면, 최근 미국에서 제기되고 있는 ‘비핵화-수교 병행’과 ‘미 의회의 법적 보장’ 논의들은 악마가 숨어있을 ‘작은 문제들’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북한이 가진 대미 불신을 해소하기에 미흡하다. 미국은 대북 금융제재에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델코방코아시아(BDA)은행이 동결한 계좌 50여개 중 3분의 1은 북한의 불법 활동과 직접 관련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금융제재로 묶인 돈이 2,400만 달러이니, 이 가운데 800만 달러 정도는 풀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원칙을 깨지 않으면서 북한에게 6자회담 복귀명분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경수로 제공과 위폐문제는 장기과제로
이제 공은 북한에게 넘어갔다. 미국의 성의 있는 조치에 북한이 보다 적극적으로 응답해야 할 차례이다. 미국이 금융제재의 부분해제에 동의하는 조건으로 6자회담에 복귀해야 한다. 그리고 ‘9ㆍ19공동성명’에 따라 관련국들로부터 경수로 제공을 구체적으로 약속받고 즉각 중유를 공급받는 조건으로 영변원자로를 동결해야 한다. 북한이나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경수로나 위폐가 작은 문제가 아닐 수도 있지만, 체제보장이나 핵 비확산의 관점에서 보면 작은 문제일 따름이다. 북한으로서는 영변원자로의 가동으로 ‘무기고를 늘리는 조치’로 미국을 압박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차피 사용하지 않을 핵무기라면 2개든 20개든 미국으로서는 마찬가지이다. 원자로 가동으로 북한의 경제적 부담만 늘어날 뿐이다. 그렇다고 이 문제들을 어물쩍 넘기자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핵 제거와 북ㆍ미수교라는 ‘출구(exit)’에서 털고 가야 할 문제가 아닌가? 따라서 북한이 경수로 문제를 훗날의 문제로 미루는 데 동의하고, 미국도 위폐문제를 장기과제로 놓고 풀어간다면 ‘로드맵’을 작성하기가 수월할 것이다. 평화체제 구축의 기회로 활용 그러나 최근 북한의 태도를 보면 아직 응답할 자세가 안 되어 있는 것 같다. 지난 5월 중순 함경남도 무수단리에서의 대포동 2호 발사 움직임에 이어, 5월 24일에는 철도시범운행을 하루 앞두고 북한측이 돌연 취소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북측의 움직임은 미국의 태도변화가 가진 진정성을 확인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기회에 대북 금융제재의 해제까지 얻어내보자는 속셈도 들어있으리라. 실제로 아직 미국의 태도가 확고한 것 같지는 않다. 대북 선박제재가 추가되는가 하면, 라이스 국무장관이 여전히 북한을 ‘악의 축’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렇다고 미국이 직접대화의 통로를 연다고 하니까 북한이 대남 강경태도로 돌변했다고 볼 필요까지는 없다. 통미봉남(通美封南)의 움직임을 경계하는 것은 언제나 옳지만 성급한 판단과 준비 안 된 행동은 일을 그르칠 수 있다. 오히려 그보다는 미국측의 대북 정책변화를 북핵문제의 해결과 남북관계의 발전에 어떻게 활용할지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최근 미국은 우리 정부가 추진하는 평화체제 구축에 대해 기본적으로 이해를 나타내고 있다. 북미 직접대화와 ‘별도포럼’이 가시화된다면, 정부가 주도하는 남북한 간의 평화체제 구축논의가 예상보다 속도가 붙을 수 있다. 현재 한국과 미국, 중국 간에는 6자회담 재개를 위한 물밑접촉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5월 25, 26일 양일간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는 우다웨이 중국외교부 부부장과 천영우 평화교섭본부장과 회담을 갖고 6자회담 재개 방안에 관해 협의했다. 이 달 말에 백남순 북한 외상이 중국을 방문키로 되어 있어, 이 자리가 중국측이 미국측 타협안을 북한에게 전달하는 기회가 될지 주목된다. 이제 북한의 대답만이 남아 있다. 김정일 위원장의 ‘통 큰 결단’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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