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연의 아침엽서

내 늙은 아내

그린빌나 2006. 6. 9. 11:15
내 늙은 아내는
아침저녁으로
내 담배 재떨이를 부시어다가 주는데,
내가
 「야 이건
 양귀비 얼굴보다도 곱네.
 양귀비 얼굴엔 분때라도 묻었을 텐데?」
하면,
꼭 대여섯 살 먹은 계집아이처럼
좋아라고 소리쳐 웃는다.
그래 나는
천국이나 극락에 가더라도
그녀와 함께
가 볼 생각이다.

미당 서정주 시인이 작고 직전 1998년에 발표한 시다.
담배 재떨이는 대체로 둥글다. 그 둥근 모양과 원만한 부부 관계가 알맞게 버물어진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보름달을 떠올린다. 모자라는 것도, 더 채워야 할 것도 없는 보름달의 원형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 닿아야 할 사랑의 종착지를 상징한다. 그 동안 미당의 시에 숱하게 등장하던 초생달의 이미지는 이 시에 이르러 비로소 환한 보름달로 가득 차올랐다. 미당은 자연스럽게 보름달의 세계를 갖게 된 것이다.
시인은 마지막 넉 줄에서 이승 이후의 삶도 ‘늙은 아내’와 함께 할 것임을 다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다짐을 아내에게 직접 고백했을까? 당신과 함께 죽어도 같이 살겠노라고? 아마 아닐 것이다. 만약에 마음속에 품어 둔 이 다짐을 발설한 것으로 읽는다면 이 시는 재미가 없어진다. 이 시의 절정은 재떨이를 비워주는 아내에 대한 화자의 반응에 답하여 아내가 소리쳐 웃는 대목이다. 기승전결에 꼭 들어맞는 구조를 가진 이 시에서 결에 해당하는 마지막 넉 줄은 소리 없는 여백으로 읽어야 한다. 그래야 시가 둥글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