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연의 아침엽서
허리에 감기는 비단도 아파라
그린빌나
2006. 6. 15. 09:31
大邱 近郊 과수원
가늘고 아득한 가지
사과빛 어리는 햇살 속
아침을 흔들고
기차는 몸살인 듯
시방 한창 열이 오른다.
애인이여
멀리 있는 애인이여
이런 때는
허리에 감기는 비단도 아파라.
박재삼 시인의 시 「無題」다. 나는 평소에 시든 그림이든 작품 앞에 ‘無題’라는 제목을 턱, 갖다 붙이는 걸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제목이 없다니! 그건 자기 작품에 대해 창작자가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소리로 들린다. ‘無題’라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제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無題’를 제목으로 내건 작품 치고 제대로 된 작품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 대체로 예술가연 하는 허위의식이 발동하거나, 작품의 미숙성을 눈가림하거나, 작가의 상상력이 부족할 때 궁여지책으로 갖다 붙이는 제목이 ‘無題’류의 시나 그림일 터이다. 특히 비구상 계열의 그림이 이런 제목을 붙이고 화랑에 걸려 있는 것을 보면 작품을 유심히 감상하고 싶은 마음이 순식간에 달아나 버린다.
그런데 나의 이런 편견을 부분적으로 수정하도록 만든 시가 박재삼의 「無題」다.
나는 습작 시절을 대구에서 보냈다. 자취와 하숙 생활 대부분은 공교롭게도 기차가 지나가는 철길 부근에서 이루어졌다. 라면을 끓이거나 설거지를 하다가 보면 몸살인 듯 열이 오른 기차가 창문을 흔들고 지나가곤 하였다.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생활하는 어린 유학생에게 기차소리는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효과음으로 들렸다. 어쩌면 그 무렵 기차가 한 차례 지나간 뒤에 남은 쓸쓸한 적막감이 나로 하여금 시를 끄적이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박재삼 시집은 민음사에서 ‘오늘의 시인총서’로 나온 활판 인쇄본 <千年의 바람>이다. 이 시집은 문학소년 시절에 상으로 받은 것이다. 시집의 속표지에는 계란 크기 만한 도장이 찍혀 있는데, '全國男女高等學生文學콩쿨大會, 東大新聞社'라는 글자가 보인다. 시집 판권에 ‘값 700원’이라고 찍혀 있는 가격 표시마저 가슴을 찡하게 한다.
낡고 해진 시집을 다시 펼쳐 읽는 날은 나도 멀리 있는 애인에게 애교 섞인 엄살을 좀 피우고 싶다. 이런 날은 "허리에 감기는 비단도 아파라."
가늘고 아득한 가지
사과빛 어리는 햇살 속
아침을 흔들고
기차는 몸살인 듯
시방 한창 열이 오른다.
애인이여
멀리 있는 애인이여
이런 때는
허리에 감기는 비단도 아파라.
박재삼 시인의 시 「無題」다. 나는 평소에 시든 그림이든 작품 앞에 ‘無題’라는 제목을 턱, 갖다 붙이는 걸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제목이 없다니! 그건 자기 작품에 대해 창작자가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소리로 들린다. ‘無題’라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제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無題’를 제목으로 내건 작품 치고 제대로 된 작품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 대체로 예술가연 하는 허위의식이 발동하거나, 작품의 미숙성을 눈가림하거나, 작가의 상상력이 부족할 때 궁여지책으로 갖다 붙이는 제목이 ‘無題’류의 시나 그림일 터이다. 특히 비구상 계열의 그림이 이런 제목을 붙이고 화랑에 걸려 있는 것을 보면 작품을 유심히 감상하고 싶은 마음이 순식간에 달아나 버린다.
그런데 나의 이런 편견을 부분적으로 수정하도록 만든 시가 박재삼의 「無題」다.
나는 습작 시절을 대구에서 보냈다. 자취와 하숙 생활 대부분은 공교롭게도 기차가 지나가는 철길 부근에서 이루어졌다. 라면을 끓이거나 설거지를 하다가 보면 몸살인 듯 열이 오른 기차가 창문을 흔들고 지나가곤 하였다.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생활하는 어린 유학생에게 기차소리는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효과음으로 들렸다. 어쩌면 그 무렵 기차가 한 차례 지나간 뒤에 남은 쓸쓸한 적막감이 나로 하여금 시를 끄적이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박재삼 시집은 민음사에서 ‘오늘의 시인총서’로 나온 활판 인쇄본 <千年의 바람>이다. 이 시집은 문학소년 시절에 상으로 받은 것이다. 시집의 속표지에는 계란 크기 만한 도장이 찍혀 있는데, '全國男女高等學生文學콩쿨大會, 東大新聞社'라는 글자가 보인다. 시집 판권에 ‘값 700원’이라고 찍혀 있는 가격 표시마저 가슴을 찡하게 한다.
낡고 해진 시집을 다시 펼쳐 읽는 날은 나도 멀리 있는 애인에게 애교 섞인 엄살을 좀 피우고 싶다. 이런 날은 "허리에 감기는 비단도 아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