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타격의 신 장효조
장효조가 선수생활을 할때 유행하던 말이 하나 있다.
"좌효조,우종모" 이것은 좌타자로서는 장효조가 우타자로서는 김종모가 가장 뛰어난 타격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물론 김종모의 타격 훌륭하지만 장효조에 비견될 바는 아니다.
장효조가 프로야구에 입단한것은 1983년이었다. 만으로 27세...하지만 내가 알기로 호적상 56년생인 그의 원래 나이는 두 살이 더 먹은 것으로 안다. 당시 세대에서 나이 한 두살 정도가 호적에서 잘못되는 일은 비일비재한 일이었으니...
만 스물 아홉. 우리나이로 서른에 프로야구 생활을 시작한 장효조는 마흔이 되도록 10년동안 네번의 타격왕과 한번의 최우수선수. 다섯번의 골드글러브에 뽑힐만큼 위력적인 날카로움을 과시했다.
통산타율 0.331 이건 아직까지 깨어지지 않는 장효조의 역대 통산타율 1위의 기록이다.
더구나 이것이 서른이 넘긴 시점에서의 기록이라니 거의 믿어지지 않는 일이라 하겠다.
장효조는 네번의 타격왕을 차지했지만 원래대로 따지자면 "여섯번"이어야 옳을지도 모를 일이다.
장효조의 타격왕 자리를 앗아간 사람은 84년의 삼성 팀 동료이자 후배였던 "이만수"
84년 이만수는 타율,타점,홈런 부문에서 3관왕의 무풍질주를 계속하고 있었다. 단지 타율에서 그는 소수점 몇자리 차이로 육박하는 선배 장효조가 3관왕을 차지하는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할 뿐...
아마 알고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당시 삼성의 김영덕 감독이 어떤 치사한 짓을 했는지를... 김영덕 감독의 이만수 MVP만들어 주기 작전에 희생양이 된 것이 다름 아니라 타격달인 장효조였다.
김감독은 10경기가 넘는 마지막 잔여게임에 이만수와 장효조 모두를 출전시키지 않았다. 장효조와 이만수가 최후의 순간까지 최선을 다했으면 어찌 되었을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안타를 만들어내는 능력에서라면 분명히 이만수보다 장효조가 한 수 위이다.
물론 여기에는 한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더 있다. 이만수와 타격경쟁을 하던 롯데의 홍문종에게 고의사구를 뿌리게 했던 김영덕 감독의 유치함 말이다. 이만수,홍문종...모두 좋은 선수지만 마지막까지 경쟁이 붙었으면 최후의 승자는 "장효조"였을 거란 생각이다.
김영덕 감독은 한국시리즈 상대고르기라는 추악한 짓을 계속하여 당시 OB베어스와의 승부를 피하고자 롯데에게 일부러 져주는 꼴불견을 연출하더니 만만하게 본 롯데에게 결국 그해 우승을 내주고 말았다. 최동원의 한국시리즈 4승과 유두열의 쓰리런 홈런이 아직껏 기억에 남는다.
90년의 장효조는 84년보다 더 안타깝다. 당시 타율레이스의 판도는 빙그레의 이정훈이 "따논 당상"이라고 생각되고 있었지만 롯데로 이적한 노장 장효조가 무서운 뒷심을 내고 막판 야구팬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한경기 4타수 4안타, 다음경기 5타수 4안타를 몰아친 장효조의 타율이 수직상승하여 1위가 장효조로 바뀌었는데 다음날 이정훈이 4타수 4안타를 때려내며 다시 역전...이제 남은 것은 단 두 경기뿐이었다. 두 선수의 타율차이는 소수점 세자리까지 일치했고 네자리에서 이정훈이 장효조를 앞서고 있는 상황이었다.
슬프게도 장효조가 남은 두게임의 상대로 결정된 것은 이정훈이 속해있는 빙그레였다.
빙그레의 감독은 "기록"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도 할 수 있는 바로 그 사람 김영덕 감독이다.
빙그레의 이정훈은 모두가 예상하는바와 같이 "결장" 타석에 들어선 장효조에게 빙그레 투수들은 하나같이 고의로 걸러보내는 치졸한 짓거리를 해대었고 낙심천만한 장효조는 "무언의 시위"로 두타석만 들어서고는 이정훈과 같이 다시는 타석에 나타나지 않았다.
표면상으로는 고등학교 후배인 이정훈과 꼴사나운 경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예전 삼성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김영덕 감독에 대해 몹시 불편한 심기였으리라.

장효조가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대구상고"시절때부터였다고 한다.
73년 고교 2학년때 사람들을 감탄시킨 천부적인 타격감각은 다음해인 74년에도 빛을 발한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나는 장효조의 고교시절에 대한 추억이 없다. 내가 야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75년부터였으니까...
당시 대한민국 넘버원의 인기스포츠는 누가 무어래도 "고교야구"였다.
1975년 대통령배 결승전. 광주일고와 경북고의 대결은 올드팬들에게 아직껏 회자되는 경기 가운데 하나로 나는 이 경기를 보면서 야구에 깊이 빠져들었다.
유명한 광주일고 김윤환의 3연타석 홈런...이를 허용한 경북고 투수 성낙수...당시 광주일고의 에이스 강만식...
1975년 초등학교 3학년 비타주리에게 있어서 "선수 김재박"의 이름이 영원히 기억나게 할 아시아 선수권 대회. 당시 김재박은 영남대 소속이었다. 천왕봉 승부인 호주와의 대결 4-4 동점 상황에서 대주자로 기용된 김재박은 드라마틱한 "홈스틸"로 결승점을 뽑았다. 김봉연-김우열-윤동균으로 이어지는 클린업 트리오에 이해창-배대웅이 1번과 2번 박해종,우용득등의 이름이 지금도 생각나곤 한다.
장효조는 75년 한양대에 입학한다. 그리고 대학교 3학년때였던 1977년 대한민국은 드디어 "일"을 내었다.
1982년 세계대회에서 한국이 홈에서 우승한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지만 사실 그 대회에서는 최강 "쿠바"가 빠졌다는 점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지만 1977년 니카라구아 수퍼월드컵 대회는 명실공히 최강국들이 다 참가한 흠잡을데 없는 세계 대회였다. 한국은 "쿠바"에게 졌지만 쿠바가 뜻밖에도 주최국 니카라구아에게 덜미를 잡히고 미국에도 지는 바람에 한가닥 희망을 갖게 되었다. 1패를 떠안은 한국의 마지막 상대는 전승을 달리던 미국...여기서 승리를 거둔 한국은 승률이 같은 미국과 결승전을 벌인다. 그래서 승리... 스코어가 3-2,5-4였으니 한점차의 신승이라 하겠다. 물론 장효조는 이 우승멤버중 하나였다.
77년 우승당시의 감독이 유명한 "김응룡"감독이고 우승의 견인차는 좌완 에이스 "이선희"였다.
한국역대 투수 랭킹을 따지는 일에서 현역선수를 제외하고 나는 좌완 투수중에서는 언제나 전성시의 이선희와 예전 삼성의 밤의 신사 "김일융"을 꼽는다. 이선희에게는 무시무시한 마구가 있었다. 오른쪽 타자 무릎을 뱀꼬리처럼 파고드는 "이선희식 슬라이더"가 그것이다. 볼의 궤적이 생소한 역방향이라 오른손 투수가 던지는 "백도어 슬라이더"나 "스크류볼"같은 효과를 볼 수 있다. 아주 희귀한 스타일의 볼이라서 그 희소성에 타자들이 농락당한다. 페넌트레이스같은 장기 레이스에는 이선희의 구질이 어느 정도 간파당해 눈에 익은 타자들이 이를 공략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지만 단 한 경기 한번도 싸워보지 않는 팀과의 대결에서 이선희가 뿌리는 슬라이더는 그 위력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만일 나에게 역대 올타임 베스트를 통솔할 권한이 주어지고 한번도 상대해 본적이 없는 초일류의 강팀과 대결했을때라면 선발투수 "포스트 초이스"는 박찬호도 선동렬도 최동원도 아닌 바로 "이선희"이다. 페넌트레이스가 아닌 세계대회같은 단기 풀리그에서 "이선희"의 진가는 그야말로 발군한다. 눈에 익으면 치기 쉬울것 같은데 도무지 눈에 익을 시간이 허락되지 않는 "이 한판"의 이선희는 일종의 불가사의한 투수였다.

장효조가 대학을 다닐때 야구팬들의 구미를 자극하는 이벤트가 바로 "한미대학선발 경기"였다.
한국과 미국의 대학대표팀이 가지는 친선전. 미국대학선발은 미국국가대표와 같은 의미이다. 아마에서는 최정상레벨이기 때문이다.
장효조...내가 장효조에게 반한 것은 이 스페셜 이벤트에서 보여준 잊지 못할 기억에서 연유한다.
장효조의 만루홈런 하나는 일종의 경이였고 충격이었으니...
그것은 내가 난생 처음으로 구경한 "좌타자 밀어치기"홈런이었다.
오늘날 밀어치기 홈런은 늘상 일어나는 일 중 하나이지만 당시에는 밀어치기 안타조차도 구경하기 힘든때였다. 밀어치기 안타를 치는 타자는 소수였고 오로지 끌어당기기 위주의 타격테크닉을 패러다임으로 가지고 있을 때였기에 밀어치기 홈런-더구나 "좌타자 밀어치기"는 야구경기가 열릴때면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귀에 끼고 살았던 나도 구경해보지 못한 천연기념물같은 것이었다.
더욱 경이적인 것은 "풀스윙"이 아니었다는 것. 장효조는 정확한 타이밍 하나만을 가지고서 툭 갖다 맞추어 공을 동대문구장 좌측 펜스를 넘겨버린 것이었다. 물론 알루미늄 배트라는 사실이 큰 몫을 했으리라 생각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이후 그렇게나 힘 안들이고 오직 타격 임팩트의 센스와 타이밍 테크닉만을 가지고서 밀어치기 홈런을 만들어내는 선수를 아직까지 보지 못한 것 같다.
장효조는 몰아치기에 능하다.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3안타 이상을 한경기에 집중해 때리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내가 알기로 그의 아마추어 통산 타율은 4할이 넘는 것으로 기억된다. 이 무지막지한 고타율의 고공비행은 국제개회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1980년 일본에서 열린 세계대회에서 그 대회 타격수위를 차지했던 장효조의 타율은 5할을 육박하는 4할 7푼대였다.
80년 세계대회는 "한"이 많은 대회였다. 우리는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그것은 불리한 대진일정에서 기인한 탓도 있었다. 당시 대한민국의 감독은 코끼리 김응룡 감독이었고 "좌선희 우동원"이라는 필살 원투펀치를 가지고 있었다. 150Km를 사뿐히 넘어서는 최동원의 강속구와 마구 슬라이더를 장착한 이선희...
시속 150이라는 것은 일종의 마의벽이다. 우리가 보통 스피드건으로 공의 속도를 잴때 사용되는 기준은 "초속"의 개념이다. 그러니까 실제 투수의 공이 포수 글러브에 도달할때쯤의 속도는 150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명심판으로 유명한 김광철씨는 대한민국에서 종속이 150이 나오는 투수는 최동원이 유일무이했다고 잘라 말한다.
우리가 만난 난적은 대진상황이었다.
최강 쿠바와 일본의 경기가 줄줄이 잡힌 것이다. 특히 그 대회 이선희의 구위는 이 정도면 "쿠바"의 강타선도 석점이내로 막아줄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위력적이었다. 명장 김응룡 감독은 에이스 이선희를 두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그리고 최후의 결단은 쿠바에 지더라도 "일본"만은 잡아야 한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쿠바와의 승부에서 우리의 "대도"김일권은 160의 강속구를 뿌리는 쿠바의 에이스 "비넨"에게 1-0으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역전 쓰리런 홈런을 뽑아내었다.
김일권은 김봉연등과 함께 1972년 최관수감독의 지휘 아래 황금사자기 결승에서 "역전의 명수"라는 닉네임을 얻어낸 군산상고 출신의 선수로 이 대회에서 한 게임 평균 2개에 육박하는 도루를 성공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쿠바는 강했다. 우리의 9-3패...
당시 이선희의 구위를 생각했을때 정말 아쉬운 승부라고 지금까지 생각한다.
일본킬러 이선희는 77년에 3-2로 일본에 승리한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한일전에 나온 이선희는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구원등판하여 일본타선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운명의 7회 일본 내야진이 에러로 자멸하는 바람에 역전에 성공하여 7-5의 승리.
우리는 이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대회 베스트멤버로 투수 이선희와 5할육박 타율 장효조가 선정되었다.

장효조는 대학졸업후 육군 경리단 소속으로 군복무를 마쳤고 실업팀 포항제철에서 잠시 활약했었다. 그리고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했는데 장효조는 원년멤버가 될 수 없었다. 이유는? 그해 가을 세계대회를 겨냥하여 "국가대표급 월척들"의 프로전향을 1년씩 강제적으로 연기했기 때문이다.
원년 백인천의 4할 타율과 박철순의 22연승...확실히 대단한 기록임이 분명하지만 따지고 보면 간판선수들이 국가대표로 빠지고 난 원년멤버들의 성격상 조금은 불편한 구석이 있다.
1982년 세계대회 아 어찌 잊으리오. 그날의 감격을...당시 장효조는 국가대표 "4번타자"였다.
마지막 일본과의 대결이 열린것은 잠실구장. 내가 고등학교 1학년때의 일이다. 야구광 친구놈 세명과 그 경기를 경기장에서 직접 보았다.
1회초 에이스 선동렬이 흔들렸다. 2루타를 포함한 연속 3안타를 두들겨 맞고 단박에 2-0으로 몰렸다. 이후 선동렬은 곧 냉정을 찾았지만 타자들의 방망이가 문제였다. 8회까지 빈공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스코어는 계속 2-0...이리되면 우승은 물 건너 간 것이다.
8회말 한국 스포츠사에서 길이남을 대역전극이 벌어졌다. 똑똑히 기억한다. 당시의 상황을.
첫타자는 8번타자 포수 심재원...심재원은 원래 5번을 치고 있었지만 이날 어우홍 감독은 타격감각이 절정이었던 "한대화"를 하위타선에서 5번으로 끌어올리면서 라인업을 재조정했다. 선두타자 심재원이 안타를 치고 나가자 "대타" 등장이다.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거포 "김정수" 김정수가 신일고 시절 충암고와의 대결에서 투수 기세봉에게 9회까지 노히트노런을 당하며 침묵하다가 김남수의 역전 쓰리런 홈런이 터진 사건은 지금도 올드팬의 입에서 회자되는 일이다.
김정수는 중견수를 오버하는 통렬한 2루타로 심재원을 홈으로 불러들였다. 노아웃에 2루 점수 2-1. 다음타자는 1번타자 "조성옥" 원래 1번은 김재박이었지만 이날 무슨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조성옥과 타순교대를 했다. 조성옥은 충실히 보내기 번트를 대었고 그리하여 1사 3루 상황에서 2번타자 김재박이 등장했다. 그 유명한 "개구리 번트"로 2-2동점 1사주자 1루. 3번 주장 이해창이 연속안타를 뿜어내며 1사 주자 1,3루...여기서 4번 장효조가 내야땅볼로 물러나며 2사 1,2루...그리고 이날의 영웅 "한대화"가 타석에 들어섰다.
한대화의 역전 쓰리런 아치는 관중석의 모든 이들을 하나로 뭉치게 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애국가"를 합창했다. "애국가"가 그리 좋은지는 그때에 처음 알았던 것 같다.

장효조는 83년 프로야구계에 들어오지만 첫해 타격왕을 차지해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그놈의 "신인왕"타이틀이었다. 신인왕은 장효조보다 한참 성적이 뒤진 "박종훈"에게 돌아갔다. 이유인즉슨 "장효조가 어째 신인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장효조는 상복이 지지리 없는 편이다. 이건 치졸한 짓을 식은죽 먹듯 해대는 "김영덕"감독 때문이었다. 김감독의 행보는 최우수선수를 결정하는 투표인단의 "심정적 동조"를 얻어내지 못하였다.
어떤 시즌에는 삼성에서 이만수,김시진,장효조를 모두 MVP후보로 내세우는 초유의 일도 서슴지 않았다. 결국 이 욕심많은 꼴불견이 가져온 결과는 해태 김성한에게 최우수선수를 헌납하는 일이었다.
1987년 장효조는 벌써 몇 년전에 품에 안았어야 했을 최우수선수상을 차지했다.
그리고 한국 야구사에서 가장 엄청난 트레이드가 곧바로 단행되었다.
롯데의 최동원,김용철과 삼성의 장효조,김시진의 맞바꿔치기...
이 네 선수는 당대 일류를 떠나 초일류의 반열에 있는 선수들이었다. 우승을 하고 최우수선수가 되어서 곧바로 친정팀의 배신을 당한 장효조...결과적으로 이 트레이드는 양팀 모두에게 어떤 이득도 가져다 주지 못했다. 네선수 모두 견디지 못한 심리적 타격으로 슬럼프에 의한 선수생활 종말을 결과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한국은 현재의 메이저리그와는 다르다. 순식간에 이적이 결정되는 요즈음의 정서와 당시의 정서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고향팀을 등진 선수중에 오직 장효조만이 살아남았다.
장효조의 깨어지지 않는 불가사의한 능력 또하나. 경이적인 출루율이다. 도합 여섯번 5년연속 출루율 수위...
마흔이 된 장효조의 10년차는 "영원한 3할타자" 장효조도 3할 이하를 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시즌이었다. 그리고 보물처럼 아끼던 출루율 타이틀도 내어 놓아야 했다.
장효조는 "은퇴"를 선언했다. 연령적으로 당연한 판단이었다.
장효조의 배번은 10번이다. 그는 타석에 들어설때 오직 한 종류의 코스,한 종류의 구질만 노리고 들어간다. 예를 들어 안쪽 직구면 그것 하나만을 바깥쪽 변화구면 그것 하나만을 말이다.
장효조는 자신이 노리지 않는 구질이라면 정가운데 밋밋한 스트라이크도 그냥 흘려보낸다. 이런 스타일이다보니 대개 승부는 투스트라이크 이후로 결정이 나버린다.
투스트라이크 이후 "장효조"는 그야말로 타격의 마왕이다.
투스트라이크 다음에 들어오는 구질에 대해서는 하나의 구질만을 노리지 않는다. "결대로 코스대로"때려낸다. 바깥쪽은 밀어치고 안쪽은 끌어당긴다. 유명한 "부채살 타법"이다.
어떨때는 투 스트라이크 이후라도 하나의 공만 노릴때가 있다. 그건 자신의 이 타석이 승부의 무게중심이라고 생각될때다. 그럴경우 노리지 않는 방향으로 스트라이크가 올때면 투수들이 가장 싫어하는 집요함을 보여준다. 소위 "장효조식 커트"라 불리우는 파울만들기. 그리고 볼은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 이 무서운 선구안이 출루율 황제를 만든 비결이다. "장효조가 투스트라이크 이후 방망이가 나가지 않으면 볼이다."는 말 들어보았을 것이다.
장효조식 커트에 관해 선동렬과 얽힌 에피소드 하나...
삼성과 해태의 대결에서 삼성은 해태선발 선동렬에게 철저히 농락당하고 있었다. 2-0의 상태에서 7회 투아웃까지 "퍼펙트"를 당하고 있었다.
7회 2사후 등장한 타자는 다름 아니라 "장효조" 장효조가 노린 공은 선동렬의 주무기인 "슬라이더"였다. 장효조가 좌타자이기에 안쪽으로 들어오는 슬라이더라 보면 되겠다.
선동렬은 기분좋게 출발했다. 볼카운트는 순식간에 투스트라이크 노볼...여기서 장효조의 진가가 발휘되기 시작했다. 장효조는 선동렬의 슬라이더를 제외한 나머지 구질의 스트라이크는 모조리 커트하여 파울볼을 만들고 유인구에는 속지 않았다. 투나씽의 볼카운트는 투 쓰리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선동렬은 장효조 한타자에게 아홉개의 공을 뿌려야했다.
선동렬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장효조가 무엇을 노리는 지를 볼넷을 내주자니 억울하고 다른코스의 스트라이크를 던지자니 계속 커트가 진행될테고...선동렬은 "에라 모르겠다." 장효조가 노리는 안쪽 슬라이더를 던져버렸다. 이것이 10구째다.
타격달인 장효조가 이걸 놓칠리 없다. 배트 중심에 맞은 안쪽공 결대로 끌어당기기는 타이밍이 아주 이상적이었다. 총알같은 직선타구가 1루와 2루 사이를 관통해버린다.
장효조에게 "약한 코스"는 없다. 즉 그에게 안타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구질이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속구"투수들에게 조금 약한 면이 있다.
이건 첫번째가 "희소성"에 의한다. 당시 시속 150을 던지는 투수들은 국내에서 손꼽을 정도였다. 그 정도 스피드를 늘상 경험해왔으면 장효조의 타격감각은 능히 이를 극복해냈을 것이다.
둘째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감각"이 둔화되었다는 것. 서른 중반이 넘어서 장효조의 감각은 확실히 아마대표에서 4번을 칠 때보다 퇴보되었다. 빠른볼의 공략법은 알고 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의미이겠다.

장효조는 1번에서 5번 어떤 순번을 맡겨도 이를 능히 소화해낼 수 있는 타자이다. 이종범이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글쎄 5번 이종범은 웬지 안 맞다는 생각이 든다.
장효조의 출루율은 독야청청,군계일학이다. 발도 무척 빠르다. 당연히 1번타자의 첫번째 요소이다.
장효조의 작전수행능력 역시 발군한다. 번트나 히트 앤드 런같은 작전을 가장 잘 받아먹을 수 있는 타자가 2번타자의 기본요건이라면 아웃코스의 공도 임의대로 끌어당길 수 있고 안쪽공도 밀어칠 수 있는 장효조의 타격센스는 능히 2번을 담당할 수 있다.
팀내 가장 고타율을 자랑하는 3번...장효조의 적임자리이다.
4번타자 장효조를 의문시하는 사람들...20대때의 장효조, 더구나 한국을 대표하는 국가대표 장효조의 타순은 4번이었다. 그만큼 파워도 있었다.
팀내에서 일발장타를 따지자면 톱이어야 할 5번 장효조. 놀라지 마시라 80년 세계대회 준우승시 장효조는 국가대표 5번타자였다. 김봉연,김용희,이만수같은 슬러거들보다 김응룡감독은 장효조를 5번타자에 더 적격으로 판단했다.
4번 5번 장효조...서른살 중반을 넘긴 시점에서 장효조의 홈런갯수로 이를 의문시하는 사람들에게 20대 중후반 "전성시"의 4할타자 장효조와 그의 장타율을 외면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거포로 소문난 장종훈이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떨어지는 장타율을 생각해보라...장효조가 프로생활을 시작한 시점을 감안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조건 홈런수치로만 환산하려는 것은 기록에 대한 것에는 군말이 있을 수 없지만 그래서 장효조의 파워가 평가절하되는 사실은 심히 불만스럽다.
더구나 장효조는 공식 홈런 비거리 수위의 초대형 홈런이 하나 있다. 잠실구장의 백스크린 상단을 맞추어버린 초대형 아치...비거리가 산정되어 나오지 않는다.
장효조에게는 별명이 많다. "타격천재""짱구""안타제조기""타격달인""부채살 명인"...
그러나 장효조에게 가장 맞는 별명은 "역시"이다.
투스트라이크 이후에서 투수를 피곤하게 만들어 결국 원하는 방향으로 공을 던지게 하여 "끝장"을 보는 10번 장효조가 "역전타"나 "동점타"를 만들어내면 다음날 일간 스포츠에서는 "역시 장효조"라는 수식어를 반드시 첨가한다. "역시 장효조"...지금까지 장효조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이런 찬사를 받아보지 못했다. "역시 장효조"다.
대한민국에서 프로야구가 한 10년쯤만 더 일찍 생겼더라면...
4할타자 장효조가 어쩌면 두 세시즌 정도는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15년 이상 연속 3할과 그 정도의 출루율왕이 나왔을 가능성은 매우 높았을 것이다.
내가 아는한 대한민국 출신의 야구선수로 "장효조"를 능가하는 타격감각을 가진 선수를 아직까지 알지 못한다. 그는 타격에 관한한 어떤 이의 도전도 허락하지 않았던 타격달인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