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묵상

사순제1주일/악마의 유혹-우리 안의 탐욕이 바로'사탄

그린빌나 2008. 2. 9. 10:59
악마의 유혹 - 우리 안의 탐욕이 바로 ‘사탄’

    마태오 4,1-11 악마의 유혹 - 우리 안의 탐욕이 바로 ‘사탄’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후에 성령에 의해 광야로 인도되어 40일을 머무시면서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성서에서 40이란 숫자는 1)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때나, 2) 악마가 극렬하게 공격하는 때, 또는 3) 심판 사건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하느님의 사람들은 40일 동안 산이나 광야에 머물러 있으면서 영적 훈련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보면 하느님은 노아 때에 사람들의 죄를 심판하기 위해 땅에 40일간 비를 내리셨습니다. 이 때는 죄악이 가득 차고 절정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을 40일 동안 정탐했는데, 이 때에 악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신앙에 빠뜨려서 40년 동안 광야에서 헤매다가 죽게 만들었습니다. 모세도 율법을 받 기 전에 시나이 산에서 40일씩 두 번이나 금식을 했습니다. 이때에 악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혹하여 금 송아지를 섬기게 함으 로 언약이 파기될 중대한 위기를 초래했습니다. (출애 34,2,28, 신 9,9,18). 또한 엘리야는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가장 타락했을 때에 그를 죽으려는 이사벨을 피해 40일을 걸어서 시나이산 으로 갔습니다. 이 때에 악마는 엘리야를 낙심하게 만들었으며, 이로 인해 그는 낙심하여 도망을 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항상 이러한 영적인 위기는 하느님의 은혜로 극복되었습니다. 하느님은 노아를 통해 새로운 은혜의 시대를 열어 주셨으며, 징계를 받았던 이스라엘도 40년 후에 다시 가나안으로 진군하게 되었고, 금 송아지를 섬긴 이스라엘 백성도 모세의 기도를 통해 용서를 받았습니 다. 그리고 엘리야 예언자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음식을 먹고, 하느님의 음성과 지시를 들은 후에 다시 힘을 얻어 맡은 바 미션을 계속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역시 이스라엘이 영적, 정치적으로 가장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에 공 생활을 시작해야 했으며, 공 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 서 40일간을 머무시면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성서학자에 의하면 주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은 이유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때문이 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이유는 40일의 시험을 거친 후에 주님께서 새 사람, 또는 하늘 의 사람으로 그 분에게 맡겨지신 메시아 직분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 었다고 했으며, 둘째 이유로는 주님께서 고귀한 직분을 수행하시기 전에 먼저 시험을 통해 훈련을 쌓기 위해서 시험을 받으셨다고 했습 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시험과 유혹을 받는 모습은 광야에서 40년을 목자 가 되어 훈련을 받던 모세와, 복음을 전하기 전에 아라비아 사막에서 훈련을 받던 바올로의 경우와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필자는 사순 제1주일 복음(루가 4, 1~13) 을 묵상하면서 다음과 같은 좀 색다른 생각이 떠 올랐습니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성령에 의해 인도되어 광야를 가시는 모습과 그 광야에서 유혹 장면을 보면서 예수님은 행복한 분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복이란 사전적으로 해석하는 진정한 의미의 행복이라 기 보다는 약간은 부러워하는 듯한 의미가 포함된 말이긴 합니다만 어떻든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40일 동안 유혹을 받으셨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왜 이 사실에 부러움을 느끼는 가 하면 저의 광야 경험 때문입니다. 저는 올해로 세례를 받은 지 40 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최근까지 너무나 자주 예수님이 겪으셨던 유혹을 겪고 있고 그 유혹 앞에 넘어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오늘 복음을 보면서 내 합리화를 위해 시험일자를 조장해 봅니다.아마 도 저도 40일 동안만 유혹을 받았다면 그래도 극복해 볼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예수님을 행복하다고 부러워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물론 문학적인 표현이겠습니다만 예수님은 사탄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외적인 존재로부터 유혹을 받고 있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의 경우를 보면 「의식할 수 없는 내 안의 무엇」, 그리고 「선을 가장한 아름다운 속삭임」의 형태로 유혹은 다가오기에 때로는 이것이 유혹 인지 조차도 구별하지 못하고 넘어갈 수 밖에 없고, 더욱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의 본능과 유혹이 너무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기에 자연 상태에서는 너무나 쉽게 유혹에 넘어가기 때문 입니 다. 쉽게 표현하면 나도 모르는 새에 유혹에 빠져 들곤 한다는 뜻입 니다. 더 솔직히 말하면 유혹이 빠져 있는지도 모르다가 갑자기 정신 을 차리고 나면 유혹에 빠졌던 나를 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물론 성서적 상징이겠습니다만 오늘 복음에 나오듯 예수님 처럼 외적으로 가시화가 가능한 존재인 사탄으로부터 유혹을 나도 받았다면, 내 의지를 가지고 그 유혹 앞에서 한번 더 저항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너무나 어린애 같은 변명을 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든 오늘 복음과 연결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수고 없는 결과, 자연의 질서를 넘어서는 결과는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만족」이란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이 말은 비용보다 보상이나 결 과가 클 때 쓰는 말입니다. 여기서 비용과 보상은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관계나 정신적인 작용까지도 포함한 말입니다만 어떻든 인간 은 「보상의 극대화」와 「비용의 최소화」를 통해 만족한 삶을 추구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노력은 반대편에 서있는 대상에게는 정 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입니다. 때문에 상호작용 안에 있는 인간 이 함께 만족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선에서의 비용의 최소 화가 이루어져야 된다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정당한 과정 없는 결 과나 수고 없는 결실을 바라는 우리의 욕심을 자제해야만 한다는 것 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순 첫 주일을 지내면서 주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 으시는 내용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전제 조건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성서 곳곳에서 빵의 중요성을 의식하 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이 왕이심을 부정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보면 빵과 권력 그 자체의 중요성은 그대로 간직되어야 하기 때 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첫 번째 유혹을 보면 우리가 극복해야할 부분이 무엇 인지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것은 빵 자체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돌더러 빵이 되라는 요구」, 즉, 수고하지 않는 빵, 즉 비용의 지출 없이 빵을 얻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가 바로 극복의 대상이 되는 것입 니다. 두 번째 유혹도 마찬가지입니다. 「악마에게 절을 하면 세상의 권력 과 영광을 주겠다」. 부정한 수단이나 죄스런 방법을 통한 권력추구가 문제가 되는 것이지, 권력자체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내용은 아닙니다. 그리고 참 매력적인 요구인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보라는 요구」 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개인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아마 예수님이 이러 한 유의 마술적인 기적을 행했다면 오늘날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성전 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간 단한 방법을 거부합니다. 이 구절에서 의미하는 바는 터무니없는 초능 력을 갖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에 대한 경고인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이 경험하셨던 사탄은 결국 외적인 존재가 아니라 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수고 없는 빵을 바라는 마음, 맹목적 인 권력 추구, 그리고 초능력을 갖고자 하는 욕심 등, 내 내면에 자리 한 욕구 아니 모든 인간 안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욕구가 바로 사탄 의 진정한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이러한 유혹을 물리치 셨다 함은 자신을 이겼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내 안의 탐욕 의 경계와 비용과 보상에 대한 올바른 마음가짐만이 자신을 이기는 길이란 사실을 우리에게 교훈으로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 게 됩니다. [말씀자료 : 두올 I 편집 : 심 바오로]

    기 도 주님, 주님께서 앞장 서 가셨으니 저도 그 뒤를 따르렵니다. 이겨낼 수 있을 만큼 주시는 고통을 떨쳐버리려 애쓰지 않게 하시고, 주님께서 제게 맡기신 역경들을 정화되고 승화되는 계기로 삼게 하소서. 주님, 주님께서 성령과 일치하셨듯이 제게도 성령을 보내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