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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그린빌나 2010. 1. 3. 18:25

2010년 본당의 사목 방향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2010년도 우리 본당의 사목방향을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는 필립보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으로 삼았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예수님의 이 말씀은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6.17)라는
지난 해 우리 본당의 사목방향을 더욱 깊게 실천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존재와 인격과 삶으로 아버지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세상에 보여주셨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의 존재로 하느님을 세상에 보여주고 또 세상에서 하느님을 느끼기 위해서이다.

지난 한 해를 살아오면서 내 존재로 남에게 하느님의 성전임을 느끼게 하는 일이,
만나는 모든 사람을 하느님의 성전으로 대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체험하였다.
성전은 여전히 내 일상과는 거리가 먼 곳, 미사 드리고 기도하기 위해 넘나드는 건물일 뿐
인격적인 실체로 내게 다가오지 못하였다.
오히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은 의문만 증폭시켰다.
나는 정말 하느님이 살아 계시는 집, 성전일까.
내가 만나는 이웃이 정말 하느님이 살아계시는 거처인가.
저 미운 사람, 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하느님의 집일 수 있을까.
실망과 좌절을 안겨주는 이 험한 세상이 정말 하느님이 살아 계시는 집일 수 있을까.

이런 질문과 함께 우리는 또 묻게 되었다.
왜 나는 나 자신을 하느님의 집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어째서 만나는 내 이웃이 하느님이 거처하시는 집으로 보이지 않는 것일까.
원인이 무엇인가.
왜 나는 예수님처럼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하고 말하지 못할까.
내 안에 이기심과 욕심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나를 위하여서는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도 이웃을 위하여서는 나 자신을 희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지극히 높은 분이셨지만 당신의 거처를 말구유에까지 낮추시고,
지극히 존귀한 분이셨지만 당신 몸을 완전히 희생하여 십자가에 죽음으로 내놓으셨다.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전부를 내려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립 2,6-8)
남의 행복을 위해서였다.
남의 행복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할 수 있는 사람만이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하고 말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극도로 자기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자기중심적인 집단으로 변해가고 있다.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날로 심화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더욱 궁지로 몰리고 있다.
정부가 억지를 부리고 있는 4대 강 개발도 강을 살리기 위한 것이라고 선전하지만
사실은 재물과 권력을 탐하는 자들이 욕심을 저희들끼리 나누기 위하여 벌이는 사업이다.
그들의 욕심 때문에 강도 죽고 사람의 마음도 함께 죽어간다.
불행하게도 교회마저 그들의 모습을 닮아간다는 느낌이다.
“부자 되게 해 주세요.” “하는 일마다 잘 되게 해 주세요.” 라는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기도를 바치는데 교회는 익숙해 있다.
하느님이 마치 우리의 이런 욕심을 채워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교회가 가난하고 힘없는 이웃을 외면하고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집단으로 변해 버린다면,
교회가 경쟁이라도 하듯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며
사람들을 자기의 집단으로 불러 모으는 일에만 열중한다면,
우리는 교회의 이름을 팔아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이다.”(1 요한 1,6)
하느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집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그 안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날로 커져 가는데도 세상이 평화롭지 못하다면,
우리가 거짓으로 살기 때문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기도를 바치는 몸으로는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하고 말할 수 없다.
희생과 사랑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자만이 이 말을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적 삶을 배워야 한다. 사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째서 십자가가 그리스도교의 상징인지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는 기도할 때는 물론이고, 식사할 때, 일을 시작하고 마무리할 때 몸에 십자가를 긋는다.
가정의 벽에 십자가를 걸고 교회 꼭대기에 십자가를 높이 단다.
우리는 우리 가까이 있는 이들 십자가들이 정말 그리스도의 십자가인지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삶을 시작하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우리가 미사에 참여하는 것은 그분의 십자가 희생에 동참하기 위해서이며
영성체는 당신을 희생제물로 내놓은 그분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이다.
영성체를 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처럼 이웃을 위해 자기를 희생 제물로 내어놓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평화는 자기희생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안다.
희생이 사랑의 원천임을 안다.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몸을 먹으며
자기를 희생하는 존재로 새로 태어난 존재이며 새로 태어남을 통해 하느님을 뵌 사람이다.

금년 한 해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한다.
십자가와 미사가 우리 삶의 중심이 되기를 기원한다.

- 희생의 제사 미사에 맛을 들이자.
- 희생과 봉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 주변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교회에 알리고 보살피자.
-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그리스도(하느님)를 느끼도록 하자
- 만나는 모든 사람이 나에게서 그리스도(하느님)를 느끼게 하자.
- 처음 보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서 인사하자.
- 성경을 가까이 하자.
- 말하기에 앞서 듣는 사람이 되자.

2010년 1월 1일
반송 성당 주임신부 이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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