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충전소/영화

위대한 침묵

그린빌나 2010. 2. 12. 10:33

관람객 평균 연령, 약 50세

2010년 새해 연휴를 맞아 아내와 함께 영화 <위대한 침묵((Die Große Stille, Into Great Silence, La Grande Chartreuse)>을 보았다. 작년 말에 보려고 했지만 예약을 할 수 없어서 올해로 넘겼다. 한 군데서만 상영하더니, 상영관이 두 군데 더 늘어났다. 1월 2일 저녁 6시 30분 메가박스.

집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영화관으로 갔다. 메가박스에서 보기 힘든 장면이 벌어졌다. 나이 지긋한 부부들이 12관으로 줄지어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위대한 침묵>의 상영관이다. 거의 만원이었는데, 평균연령이 적어도 50세 정도는 될 것으로 보였다.

 

카르투지오 수도회 봉쇄수도원의 다큐멘터리 영화

미리 검색한 영화에 대한 정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감독은 필립 그로닝. 카르투지오 수도회의 알프스산맥 1300m 고지에 있는 봉쇄수도원인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Le Grande Chartreuse)의 자연과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카르투지오 수도회는 쾰른의 성 브루노(1030-1101)에 의해 1084년 설립됐고, 카톨릭 교회에서 가장 엄격한 수도회로 알려져 있다. 전 세계에 19개의 수도원이 있는데, 우리나라에도 상주시에 있다고 한다.

현재의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 건물은 1688년 지어졌다. 그 모습이 대중에게 공개된 것은 1960년 수도사들을 찍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수도원에 들어갔던 기자들이 찍은 사진이 전부였다.

 

1984년 처음 제안 후 1999년 승낙을 받고 2005년에 개봉한 영화

필립 그로닝 감독은 1984년 침묵에 관한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카르투지오 수도원이 적격이라 판단하여 영화 찍기를 제안했다. 그러나 수도원 측으로부터 거절당하였는데, 그로부터 15년 후인 1999년에 승낙을 받았다.

촬영을 시작할 때 수도원에서는 몇 가지 조건을 걸었다. 인공조명을 사용하지 말 것, 자연적인 소리 외에는 어떤 음악이나 인공적인 사운드를 추가하지 말 것, 수도원의 삶에 대한 어떤 해설이나 논평은 금할 것, 다른 스텝 없이 혼자 촬영할 것 등등.

준비과정을 거쳐 2002년 봄과 여름의 4개월, 2003년 겨울 3주, 그리고 2003년 12월 말 3일, 이렇게 총 2년에 걸쳐 6개월간 촬영이 진행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가을의 단풍 든 장면이 없다. 촬영 허가를 받은 후 감독은 수도원 내에 머물며 수도사처럼 독방에서 생활하면서 설거지와 청소, 정원 일을 하며 수도원의 의식과 일상에 직접 참여했다. 영화감독으로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은 하루 2~3시간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리고 2005년 11월 10일 독일에서 처음 개봉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해 12월 씨네코드 선재에서 단관으로 개봉했는데 좌석점유율 및 예약률이 높아 개봉관을 서울의 몇 군데와 부산으로 확대했다.

 

수도사들의 독방 수도

카르투지오 수도사들은 독거 생활을 통해 세 단계로 신에게 다가선다고 한다. 세상과의 단절, 독방에서의 생활, 그리고 내면의 고독 또는 ‘마음의 고독’이 그것이다.

수도사들은 독방에서 생활한다. 그랑드 사르트뢰즈 수도원은 미사를 보는 본당이 있고, 수도사들이 주거로 사용하는 건물과 기타 용도의 건물들이 여러 채 있다. 본당에서 종을 울려 시간을 알리고 공동으로 할 행사를 전달한다.

매일 공동으로 미사를 보는 시간 이외에는 독방에서 생활한다. 대부분의 시간을 독서와 침묵으로 수양하고, 그레고리안 성가로 묵상을 하며, 악기는 일절 쓰지 않는다. 자정에는 시편과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으며, 두 번에 걸친 기도와 침묵의 시간을 갖는다.

식사도 독방으로 전달되어 혼자 먹는다. 다만 주일과 축일에는 저녁식사를 공동으로 한다. 1주일 한 번 4시간 정도의 산책시간이 있는데, 이때에는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밥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하는지를 놓고 토론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런 문제도 토론의 주제가 될 수 있다. 거의 마지막쯤의 눈 쌓인 산으로 산책을 가서 설피를 신거나 엉덩이로 눈썰매를 타는 장면에서는 웃음을 자아낸다.

음식은 빵과 과일, 채소 등이 주종인 것으로 보이는데, 육류를 먹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소를 목축하고 있기는 했다. 수도원은 방문객을 받지 않으며, 라디오나 텔레비전도 없다. 수도원장이 세상 소식을 전해준다고 한다. 수도사들은 일 년에 두 번, 묵상 기간에 가족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수도사들은 서로 마주쳐도 말로 인사를 나누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인사말을 딱 한 번 들었다. 머리를 깎아준 수도사에게 “Danke schön.”하고 인사를 하는 늙은 수도사가 있었다. 수도사들에게는 노동이나 운동시간이 별도로 부여되지 않는 것 같다. 먹는 것을 자급자족하지도 않는 것 같다. 채소밭이 있기는 했지만 자급자족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렌지 등 과일도 제공되었는데 수도원에서 직접 가꾸는 장면은 없었다. 생수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생수도 제공되는 모양이다.

 

유보된 ‘떠나갈 자유’와 ‘받아들이지 않을 자유’

영화는 “봄은 겨울로부터 오는 게 아니다. 봄은 침묵으로부터 온다.”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눈 덮인 알프스를 배경으로 겨울 수도원 정경이 전개된다.

두 명의 젊은이가 수도원에 새로 들어간다. 원장 수도사는 새로운 멤버를 들이면서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는 공동체로부터 “떠나갈 자유”가 유보되어 있고, 공동체(수도원)는 “받아들이지 않은 자유”를 유보하고 있다고 말한다. 선배 수도사 전원이 포옹으로 환영해 주었다.

수도원에는 전체적으로 스물다섯 명 정도의 수도사들이 있었다. 원장과 수도 담당 수도사가 있는 것 같았고, 취사 담당과 이발 담당도 있었다. 머리는 스님처럼 완전 삭발이다. 정해진 날에 모두 같이 이발을 하는데, 담당 수도사와 고용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전기 바리깡으로 밀었다.

수도원에는 전기가 들어왔고, 원장은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었다. 겨울에 수도사들의 독방에는 난로가 설치되었다. 거의 첫 장면에 난로가 나와 연료가 무엇인가 궁금했는데, 한참 지나면 자기 방에 쓸 장작을 스스로 잘라서 패오는 장면이 나와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었다. 가는 이를 가진 톱으로 통나무를 정해진 크기로 잘라 도끼로 팼다. 두 도막 정도를 내야 하루 쓸 수 있는 모양인데, 워낙 톱니가 작아서 두 도막 자르는 데도 땀을 뻘뻘 흘렸다.

 

인내심을 갖고 느긋한 자세로

162분의 비교적 긴 영화다. 스토리 전개가 거의 없다. 화면의 전환도 매우 느리다. 인공조명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두울 때 찍은 화면이나 실내의 화면이 선명하지도 않다. 겨울 장면을 찍은 것 중에는 카메라가 얼은 경우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관람을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다. 하긴 평생 독방에서 수도해야 하는 마당에 급할 이유가 전혀 없기도 하다.

중간 중간 자막이 나온다. 특히 다음 구절은 반복적으로 나온다.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려야, 나의 제자가 될 수 있느니라.”

“주께서 나를 이끌었으니, 제가 이곳에 있나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이끄는 곳으로 간다? 쉽지 않은 결단이다.

저녁에 모든 불이 꺼진 후에 촛불 하나만 켜져 있는 모습이 자주 나왔다. 영화가 끝난 후 아내가 성체를 모셔둔 감실(龕室)에 항상 켜져 있어야 하는 불이라고 설명해줬다. 장작불이 타는 모습도 초반 부분과 마지막 부분에 나왔다.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보는 사람마다 각자의 의미가 다를 것이다.

 

모두 다 하느님의 뜻?

중간 중간에 수도사들의 얼굴을 크게 잡아 몇 초씩 보여주었다. 비교적 젊은 사람부터 매우 고령의 사람까지 있는데, 모두 표정이 티 없이 맑다. 그와 같이 경건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한다면 그렇게 맑아지는 것이 당연할 것 같다.

마지막 부분에 고령의 시각장애인 수도사를 인터뷰했다. “죽음은 두려워 할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갈수록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안타깝다고 한다. 그러면서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취지로 말한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지금 이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모두 하느님의 역사(役事)로 볼 수만은 없을 것 같다. 4대강 사업의 일방적 추진과 예산안 날치기, 미디어법과 노동법의 날치기를 주님의 뜻으로 볼 수는 없는 일이다.

누군가 한 말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저들의 하느님과 우리의 하느님은 왜 이다지도 다른 것일까?”

올 한 해 걱정이 많다. 침묵만으로 해결될 일은 결코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침묵의 수도를 하는 자세는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가더라도 필요하지 않을까? 한 해를 보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비축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출처 : 블로그 > yeominlaw님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