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성지와 사적지

[스크랩] [청주교구] 감곡성당

그린빌나 2008. 12. 31. 09:52

 


"나는 여러분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하였습니다."
매산 기슭 감곡성당으로 오르는 길목의 작은 팻말 내용이 인상적이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8호 감곡성당은 파리외방전교회 시잘레(chizalle)신부가 설계,1928년 공사에 들어가 3년만에 완공한 고딕식 붉은 벽돌 성당은 110년간 충북은 물론 경기 남동부 일원에 복음의 씨앗을 뿌려온 믿음의 고향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다는 36.5m의 중앙종탑에 8각 첨탑 또한 위압감을 주기보다는 포근하게 다가섰고 금세라도 종소리가 퍼질듯 했다. 성당 발치엔 감곡 들녘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감곡 본당(甘谷本堂)은 충북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 (旺場里) 357-3 소재하는 11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성당이다. 1896년 9월 17일 본당으로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매괴의 성모. 설립 당시의 명칭은 ․장호원 본당'(長湖院本堂)이다. 감곡매괴성모성당은 처음부터 성모님께 봉헌된 곳이다. 또한 성모신심과 성체신심을 바탕으로 신앙의 못자리가 된 곳이며, 150여명의 성직자와 수도자를 배출한 성소의 못자리이기도 하다.

감곡본당에서만 51년간 사목하다 세상을 떠난 임 가밀로(Bouillon Camill, 부이용, 한국명 임가미, 任加彌) 신부는 감곡 공동체의 주춧돌로 남아 있다. 둥근 차양의 선교사용 모자를 오른손에 들고 긴 수단을 걸친 채 매산기슭 성모광장의 로사리오 성모를 응시하는 듯한 임 가밀로 신부의 동상 모습은 감곡 공동체에 드리워진 임 신부의 그림자를 그만큼 반영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징표들은 1934년 건립된 옛 사제관을 개축, 2002년 10월 개관한 '유물관'에 풍부하게 담겨 있다. 1914년 국내 첫 성체거동 때부터 사용했던 성광과 금색 제의, 영대, 구두, 그리고 정약종(아우구스티노) 순교자가 지은  룗주교요지(主敎要旨)룘 1906년판 등 문서류, 본당사를 개괄한 각종 사진 등 50여점은 100여년간 신앙의 발자취를 그대로 담고 있다. 더 대단한 것은 항온·항습시설이 완벽한 수장고에 수장된 나머지 250여점의 유물이었다.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제구와 서적, 심지어는 은행놀이판과 카드까지 각종 유물이 완벽하게 정리돼 유물번호까지 매겨져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정리돼 있다. 또한 유물관에서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은 다락방 성체조배실이다. 햇살이 천장 창문을 통해 야트막하게 비겨드는 성체조배실에 들어서 무릎을 꿇고 빛나는 성광 속 성체를 바라보며 조배를 하노라면,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기쁨에 금세 빠지게 된다. 역시 국내에서 첫 성체거동을 거행한 성당의 성체조배실답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신앙의 현장이다.

성당에 들어서면 제대 정면에는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게 7발의 총탄을 맞았다는 본당 주보 묵주기도 성모상이 눈에 들어왔다. 프랑스 루르드성지에서 제작돼 1930년 성전 봉헌 당시 제대 중앙에 안치된 성모상은 7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건재했다. 성당 내부 천장 원형 돔(Dome)이나 제대 양쪽의 4개 소제대, 기둥으로 구분되어 세개의 회랑으로 나뉘어진 신자석, 라틴 십자형 평면 구성은 국내 다른 옛 성당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성체신심'과 '성모신심'을 두 기둥으로 삼아 성장해온 감곡매괴성당은 한마디로 임 가밀로 신부를 통한 성모님 사랑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감곡 성당의 성모신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임 가밀로 신부의 성모신심을 이해하는 것이 열쇠다. 1869년 성모발현지 루르드에서 불과 20㎞ 밖에 떨어지지 않은 프랑스 남서부 타르브교구 비에유 아되르에서 태어난 임 신부는 정기적으로 어머니와 함께 루르드를 방문, 자신을 루르드 성모께 봉헌하며 성장했다. 1893년 사제 수품 후 그해 9월 조선에 입국한 임 신부의 성모신심은 감곡에서 기도의 응답으로 꽃을 피우게 된다.

그 대표적 사례가 매산 중턱의 신사(神社) 건립 사건. 일본인들이 매산 중턱에 신사를 지으려고 한 것은 1943년. 이에 임 신부는 성당 뒷쪽 매산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무염시태) 기적의 패'를 묻어 두고 성모께 "이 공사를 중단하게 해주신다면 이곳을 성모님께 봉헌하겠다"고 기도했다. 그런데 일인들이 공사를 진행하려 하면 여러 가지 기상이변이 일어나고 큰 짐승이 출현하는 바람에 번번히 공사가 중단됐으며 결국 2년 뒤 해방이 되면서 공사는 완전히 중단됐다고 전해진다. 그 뒤 1955년 8월15일 매산 중턱은 성모광장으로 봉헌됐고, 이후 성모광장은 감곡본당이 1914년부터 해마다 거행해온 성체거동 행사의 장소로 자리잡았다. 따라서 감곡성당을 찾는다면, 성모광장을 중심으로 한 매산은 잊지않고 꼭 들려봐야 할 '기도의 산'이 됐다. 성당 교육관을 지나 묵주기도 15현의(玄義), 성모 광장, 십자가의 길 14처를 따라 매산 정상을 거쳐 성당으로 돌아오는 기도 행로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기도의 풍요로움을 간직하고 있다. 평일이라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소박하면서도 단아하고 고요하면서도 평화스러운 매산 기슭에서 호젓하게 1시간 안팎 자신을 돌아보며 기도를 바칠 수 있는 매력적 기도처가 되고 있다.

매산 초입에 들어서면 마주하게 되는 '묵주기도 15현의'는 특히 묵주기도 15단을 조각으로 표현해 놓은 기도처로, 성모신심의 진수를 보여준다. "성모신심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생활의 중심에 두고 성모와 같은 마음으로 예수를 생활의 전부로 살아가는 데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를 통해 성모의 사랑을 뜨겁게 체험한 감곡 공동체는 임 가밀로 신부를 통해 성모의 사랑이 살아 숨쉬는 성당 일대를 '매괴 성모 순례지'로 개발하고 있다. 1896년 여주 부엉골에서 사목할 당시 임 가밀로 신부는 이곳 매산 언덕에 있는 명성황후 육촌오빠 민응식의 109칸짜리 저택을 보고 "성모님, 저 대궐같은 집을 주신다면 당신의 비천한 종이 되겠고 주보는 매괴 성모님이 되실 것"이라고 기도했다. 그 기도의 결실이 '매괴 성모 순례지'의 개발로 마무리되고 있는 셈이다.

매괴 성모 순례지 개발은 특히 '어머니의 품'이라는 주제 속에서 프로그램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다. 기도와 성체성사 적극 참여, 고해성사, 성체조배, 희생 및 금식 권면 등 성모께서 루르드나 파티마, 메주고리예 등지에서 발현해 남기신 다섯 가지 핵심 메시지를 중심으로 매달 첫 토요일 8시마다 진행되는 '기도와 찬미의 밤'은 매괴성모순례지의 핵심 프로그램이다. 또 평일이나 주말 1일 피정 희망자들을 위해 미사와 감곡 매괴성당 소개, 매괴유물관 관람, 성체조배, 산상 십자가의 길 기도, 음악피정 등으로 이뤄진 1일피정을 진행하고 있다.

 



■ 감곡 성당의 설립과 정착

장호원 지역은 본래 부엉골 본당 관할 구역에 들어 있었다. 부엉골은 현 경기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康川面釜坪里)에 있던 산간 마을로 1885년 예수성심신학교가 설립되면서 교우촌이 조성되었고, 1887년 신학교가 서울 용산으로 이전한 뒤에도 얼마 동안 본당으로 남아 있었다. 그 후 장호원 지역이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1894면 봄 부엉골 본당 신부로 부임한 부이용(Bouillon, 任加彌) 신부 때였다. 그는 이곳에 부임한 뒤 본당 위치가 적당치 않음을 깨닫고 장차 이를 이전할 장소를 물색하던 중 1896년 5월 장호원의 매산 언덕에 자리 잡고 있던 한옥을 매입하게 되었다. 이집은 본래 임오군란 때 민비(閔妃)가 일시 피신하기도 했던 민응식(閔應植)의 한옥으로 그 전해 말 의병과 일본군의 전쟁 속에서 불타 버린 상태였다.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허락을 얻어 이를 매입하게 된 부이용 신부는 부엉골에 거처하면서 불탄 집을 수리하였으나 일이 여의치 않자 예정을 앞당겨 1896년 9월 17일 장호원으로의 본당 이전을 결행하였다. 이로써 부엉골 본당은 폐지되었다. 당시 장호원에는 신자수가 5-6명에 불과하였지만, 본당의 관할 지역은 매우 넓어 경기도 여주 ․ 이천 ․ 충청도 단양 ․ 제천 ․ 충주 ․ 음성 ․ 괴산 ․ 진천 ․ 청주 ․ 보은 등이 여기에 속하였으며, 공소수 27개에 총신자수는 1,300여 명에 이르고 있었다. 장호원에 정착한 뒤 부이용 신부는 우선 사제관과 그에 딸린 소성당 공사를 계속하여 그 해 12월 5일 이를 완공하였다. 그러나 장호원 자체의 신자수가 증가하였고. 또 20여개에 이르는 공소의 신자들도 증가하는 상태였으므로 성당 건립이 시급하였다. 이에 그는 1903년 성당 신축을 시작하여 다음해 9월에 이를 완공하고. 그 해 10월 2일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갖게 되었다. 신축 성당의 규모는 한옥과 양옥의 절충식으로 총 80평에 달했다.

■ 성장과 변모

본당이 점차 정착되면서 부이용 신부는 우선 교육 사업에 눈을 돌렸다. 이에 그는 1907년 남학교인 매괴학당을 설립하고 이어 1912년에는 여학교를 설립했는데. 그중 여학교는 그 해 본당에 부임한 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이 교육을 담당했다. 이들 학교는 이듬해 6년제 보통학교로 과정이 변경되었다. 한편 부이용 신부는 조림 사업에 솔선수범하였으며, 1914년부터 매산(장미의 언덕)에서 성체 거동을 시작하였고. 1922년에 학교 건물을 1차 개축하였다가 1936년 정식인가를 받고 3층 교사로 증축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본당에서는 1930년 10월 7일에는 종각 높이가 130척이 넘는 현재의 고딕 연와조 성당을 신축하고. 1933년 본당 성가집을 편찬 간행하였다. 이렇듯 부이용 신부와 신자들의 열성으로 본당의 교세도 크게 증가하여 1937년에는 총 신자수가 2.150명이 되었다. 일제 말기가 되면서 다른 본당들과 마찬가지로 장호원 본당도 어려움을 겪어야만 하였다. 일본인들의 감시와 간섭이 계속되었고, 1942년에는 보좌 조인환(曺仁煥)(베드로) 신부가 사소한 일로 투옥되기까지 하였다. 한편 일제 당국에서는 매산 언덕에 자기네들의 신사(神社)를 건립하려고 획책한 일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해 부이용 신부가 일본인들의 적국인 프랑스 선교사라는 이유 때문에 용산신학교에 연금되어야 했다.

그 결과 장금구(莊金龜, 그리소스토모) 신부가 제2대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게 되었고. 이어 다음해에는 유영근(劉榮根, 요한)신부가 부임하여 해방을 맞이하였다. 이때 신자들은 한일합병 당시 부이용 신부가 제대 밑에 숨겨 두었던 태극기를 게양하고, 부이용 신부를 맞이하여 광복의 기쁨을 맛보았다. 부이용 신부는 이해 11월 제4대 주임으로 다시 부임하여 활동하다가 1947년 10월 선종하였고, 뒤를 이어 보좌로 활동하던 박고안(朴稿安, 프란치스코) 신부가 주임으로 임명되어 6. 25 동란을 겪었으며, 그 후 1953년 3월에 매괴학교를 매괴상업학교로 변경하였다. 이 학교는 1966년에 여자중학교를 병설한 뒤 학칙을 변경하여 매괴여자중 ․ 상업학교로 인가를 받었으나, 국민학교는 1972년에 폐교되었다.

한편 감곡 본당은 충청북도의 모본당으로서 그 동안 많은 자본당을 낳게 되었다. 1920년 고마리 본당(증평 본당의 전신), 1932년 청주 본당 (수동 본당의 전신), 1945년 충주 본당,1957년 무극 본당(현 금왕 본당) 등이 분할 설립되었으며. 다시 이로부터 여러 자본당들이 분리되었다. 뿐만 아니라 교회 묘지의 매입, 자선 활동. 신심 활동 등을 통해 본당을 지역사회 안에서 활동하는 공동체로 성장시켜 왔으며, 1986년 본당 설립 90주년을 맞이히여 성모 동산을 정비하고 부이용 신부의 입상을 제작, 축성하는 동시에 <감곡 본당 90년사>를 편찬 간행하였다.

◆ 청주교구 감곡본당과 태극기

구한말의 태극기는 청주교구 감곡본당에도 인연이 이어졌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임 가밀로 신부는 한불조약 이후 조선에 입국, 고종황제로부터 직접 태극기를 하사받는다. 이 태극기가 그 유명한 감곡성당 소장본 태극기로, 안타깝게도 현재는 사진만 남아있을 뿐 원본 태극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이 태극기는 1886년 조선 외교고문으로 활동하면서 청의 간섭을 신랄하게 비난했던 데니(Deny, Owen N)가 소장했던 태극기와 동일한 형태로, 태극 음방과 양방의 몸체가 가늘고 길게 그려져 있으며 1874년 청나라에서 발간된 룗통상조약장정성안휘편룘이라는 책 표지에 그려진 태극문양인 통상약장태극문양과 비슷하지만 음방과 양방의 위치가 다르다. 감곡본당 신자들은 일제강점으로부터 해방되자 이 태극기를 본떠 태극기를 그려 만세를 불렀고 광복의 기쁨을 나눴다. 감곡본당 소장 태극기는 1950년께 충북도청에서 빌려간 후 행방을 알 수 없다.

■ 찾아가는 길

출처 : 세포네
글쓴이 : 세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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