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성지와 사적지

마산교구 '명례' 복원 · 성지조성 박차

그린빌나 2009. 1. 28. 09:46
마산교구 '명례' 복원 · 성지조성 박차
 
교구 최초의 본당… 성역화 5개년 사업 추진
 
 
<사진설명>
▲ 성지조성을 추진하고 있는 명례성전의 전경. 1935년 태풍으로 전파된 것을 1938년 축소 복원했다.
▲ 명례성전의 내부. 남녀 신자석이 칸막이로 분리돼 있어 초기 신자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마산교구는 잊혀졌던 명례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성역화 작업을 추진하기 위해 명례성지조성위원회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발걸음을 시작했다.
 
명례성지조성위원회는 10월 4일 모임을 갖고 조직 구성과 회칙제정(안) 및 향후 5개년 중장기 계획에 대한 논의를 가졌다.
 
세부 조직으로는 사업분과, 재정분과, 홍보분과 등을 신설했으며 ▲ 2008년 사업으로 역사적 사료와 자료들을 수집·검증하는 작업을 ▲ 2009년에는 1차기금 모금 및 성지홍보 홈페이지 개설을 ▲ 2010년과 2011년에는 순교영성 세미나 개최와 기금모금에 총력을 기울이고 ▲2012년 결실을 맺어 합동 미사를 봉헌한다는 5개년 중장기 계획을 수립했다.
 
 
‘명례’는 어디?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남쪽엔 밀양과 김해를 잇는 강변마을 ‘명례’가 있다. 명례는 나루에 걸맞게 예로부터 외지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고 경제활동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차츰 도로가 확충되고 배를 사용하지 않게 되면서 마을의 규모는 작아지고 번성했던 모습을 역사 속에 뒤로한 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조금씩 잊혀졌다.
 
그곳 ‘명례’에는 사용되지 않는 버려진 성당이 하나 있다. 언덕 위에서 낙동강을 바라보며 주변의 고송들만큼 오래됐음직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곳엔 더 이상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입구에는 거미줄만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곳 명례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많은 의미가 있는 곳이다. 현재 마산교구의 관할 지역에서는 가장 오래된 최초의 본당이고 경상도 전체에서 네 번째로 설립된 본당이다. 또한 124위 시복시성 대상자 중 한명인 신석복 마르코 순교자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고 한국 땅에서는 최초로 사제로 서품된 강성삼 신부의 첫 사목지이자 숨을 거둔 곳이기도 하다.
 
 
명례와 한국교회사
 
1897년 본당으로 승격됐던 명례는 신자들의 자발적인 모금으로 현재의 위치에 부지를 매입했고 강성삼 신부는 그 땅에 네 칸짜리 집을 지었다. 이후 1926년 새로 부임한 권영조 신부가 기와로 된 성당을 지어 1928년 낙성식을 가졌지만 아쉽게도 이 성당은 1935년 태풍으로 전파되고 만다. 지금의 성전은 1938년 무너진 자리에 축소 복원한 것이다.
 
그러나 명례에는 역사적으로 소중한 자료들이 많다. 처음 본당이 설립되며 사용된 제대와 십자가, 남녀 신자석이 칸막이로 분리되어 있는 내부는 초기 신자들의 기도하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좋은 자료다.
 
명례는 시복시성 대상인 신석복 마르코 순교자의 생가 터가 있는 곳이다. 1828년에 태어난 그는 농사를 지으며 누룩과 소금 행상을 했고 피난교우들의 권유로 신자가 됐으며 병인박해때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들에 붙잡혀 1866년 3월 31일 순교하게 된다.
 
마산교구 성지및사적지정비소위원회 부위원장 신은근 신부는 “명례는 마산교구에서 처음으로 밝혀지는 교우촌이니 만큼 그 의미가 크다”면서 “한국천주교와 마산교구 신자들이 명례에 대한 관심과 재조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명례본당과 강성삼 신부
 
명례본당은 대구본당(1886년), 가실(왜관)본당(1894년), 부산본당(1890년)에 이어 경상도 지역에 세워진 네 번째 본당이며 현재 마산교구의 관할 지역에서는 최초의 본당이다.
 
명례에 신자들이 처음 나타난 것은 정해박해(1827년) 이후로 박해를 피해 정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강 건너 김해시 한림면과 생림면에 살던 교유들과도 교류를 가졌으며 병인박해 때 많은 교우들이 잡혀갔지만 박해 후 다시 모여들었다.
 
명례본당은 경남지역 첫 본당인 부산본당 주임 파리외방전교회 죠조(jozeau) 신부의 사목 방침에 따라 경남 중부 지역에 본당을 신설해 부산의 서쪽을 전담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설립됐다.
 
신자들의 열망으로 명례공소는 1897년 6월 본당으로 승격하게 됐으며 초대 주임으로 강성삼 신부가 발령받게 된다.
 
강성삼 신부는 김대건 신부(1845년 서품)와 최양업 신부(1849년 서품)에 이어 세 번째로 강도영·정규하 신부와 함께 1896년 4월 26일 약현성당에서 뮈텔 주교 주례로 서품 됐다. 한국 땅에서 최초로 서품을 받은 강신부는 휴양 차 명례 주임으로 발령을 받았으며 본당에서 7년을 사목하다 1903년 9월 19일 명례에서 37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강신부가 죽자 명례본당은 다시 공소가 되었고 마산본당에 속했다. 그리고 1926년 5월 10일 권영조 신부가 부임하며 다시 본당으로 재 설립되기도 했으나 1930년 삼랑진으로 본당 소재지를 이전하며 다시 삼랑진본당 소속 공소가 된다. 이후 진영본당을 거쳐 현재는 수산본당 관할 하에 있다.
 
 
“신앙의 못자리 명례 성지 조성에 관심을”
[인터뷰] 명례성지조성위원회 위원장 이제민 신부
 
 
“명례성전이 선조들의 신앙을 느끼게 하는 성전으로 새로 세워지길 간절히 희망합니다. 신앙의 역사를 느끼게 하는 명례가 마산교구에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명례성지조성위원회’ 위원장 이제민 신부(반송본당 주임)는 명례가 갖는 역사적인 의미를 강조하며 신자들에게 명례를 알리는 것이 성지 조성을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이라고 밝힌다.
 
“2006년 진영본당에 부임하며 우연히 명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낙동강을 따라 경상남도에 천주교가 들어온 길목이었던 명례가 순교자 신 마르코의 출생지이며 마산교구의 첫 본당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관심을 부추겼습니다.”
 
하지만 이신부가 찾은 명례의 첫 인상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거미줄을 뜯으며 들어서야했던 성전은 울컥 슬픈 마음을 일게 했습니다. 명례 옆에 지금은 우사로 변해버린 곳이 현재 124위 시복시성 대상자인 신석복 마르코 순교자의 생가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이신부는 시복시성에 앞서 필요한 것은 순교자들에 대한 정신을 찾고 따르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순교자들의 영웅적인 모습을 강조하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신앙 선조의 모습과 정신을 본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순교의 정신을 느끼게끔 많은 신자들이 방문하고 삶에 적용되는 모습이야말로 참으로 순교자를 기리며 그 정신을 본받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민 신부는 앞으로 성지 조성을 위해 부지 매입 등의 어려움이 남아있지만 잊혀졌던 명례의 성지 조성을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신자들의 관심이라고 설명한다.
 
“현재 방문하는 신자들의 모임을 위해서 성지의 정비작업이 한창 진행 중입니다. 언제든지 찾아와 조용히 기도하고 또 삶의 힘을 얻어갈 수 있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가톨릭신문, 2008년 10월 26일, 이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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