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연의 아침엽서

낡은 집

그린빌나 2006. 6. 7. 16:17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에 물려줄
은동곳도 산호관자도 갖지 못했니라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랜
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모도 모른다

찻길이 뇌이기 전
노루 멧돼지 쪽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놓고 뛰어다니던 시절
털보의 세째아들은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털보네는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래두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
마을 아낙네들은 무심코
차그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보냈다는
그날 밤
저릎등이 시름시름 타들어가고
소주에 취한 털보의 눈도 일층 붉더란다

갓주지 이야기와
무서운 전설 가운데서 가난 속에서
나의 동무는 늘 마음졸이며 자랐다
당나귀 몰고 간 애비 돌아오지 않는 밤
노랑고양이 울어 울어
종시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어미 분주히 일하는 방앗간 한구석에서
나의 동무는
도토리의 꿈을 키웠다

그가 아홉 살 되던 해
사냥개 꿩을 쫓아다니는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데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북쪽을 향한 발자옥만 눈 우에 떨고 있었다

더러는 오랑캐령 쪽으로 갔으리라고
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
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탐스럽게 열던 살구
살구나무도 글거리만 남았길래
꽃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울안에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1930년대 후반에 시인 이용악이 목도한 낡은 집은 일제 강점기하의 비극적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그 당시 일제는 러·일전쟁에 승리한 이후 조선을 대륙병참기지로 정하고 중국과 조선에 대한 수탈을 극도로 강화하였다. 국가총동원법, 황국신민화 정책 등이 추진되었던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그야말로 초근목피의 세월이 우리 민족의 생존을 송두리째 뒤흔들던 때였으니, 만주로 러시아로 생계를 위해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시인은 어린 화자의 눈을 통해 그 당시 민중들의 생활상을 마치 단편소설처럼 펼쳐 보여준다. 한 편의 시 안에 오랜 세월 동안 한 가족이 겪어야 했던 참담한 이야기가 들어앉아 있다. 아이들은 축복도 받지 못하고 태어나 가난하게 살아야 했고, 가장은 가장 대로 식솔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야반도주를 감행해야만 했다. 떠나지도 못하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북쪽을 향한 발자옥만 눈 우에 떨고’ 있는 것을 바라보아야 했다.
「낡은 집」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천치의 강아」 「강가」 「전라도 가시내」 「북쪽」 「오랑캐꽃」 같은 빼어난 작품을 남긴 이용악은 “일제 강점기에 대규모적으로 발생한 국내외 유이민(流移民)의 비극적 삶을 깊이 있게 통찰하고, 또 이를 민족모순의 핵심으로 명확히 인식, 자기 시에 정당하게 형상한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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