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충전소/가보고싶은곳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역 - 태백선 추전역

그린빌나 2007. 3. 19. 10:27

 

내가 초등학생일 무렵이니 20년 이상된, 꽤 오래 전 일이다.

연예인들이 출연하는 TV 오락프로그램이었는데 사회자가 "넌센스 퀴즈"라며 질문을 하나 던졌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역은 어디일까요?"

 

정답을 맞춘 출연자는 아무도 없었고 결국 사회자가 다시 정답까지 공개했다.

답은 "서울역"이었다.

 

요즘도 이런 표현 많이 쓰지만 다들 '서울에 올라간다'고 하지 '내려간다'라고 하는 사람은 없으니 '서울역이 가장 높은 역'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철도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실제로 가장 높은 역은 어디일까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고 곧 태백선의 추전역이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정작 기차로 이 험한 오지를 지나가보는 데는 대학 들어가 첫번째 방학을 맞을 때까지 또다시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야 했다.

그때까지 나에게 추전역은 막연한 동경의 장소로 남아 있어야했다.

 

높이라는 것은 항상 상대적인 것이니 '해발 855m'라는 숫자는 그다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제일 높다', '가장 높다'라는 말, 그래서 더 이상 올라가서 내릴 수 있는 역이 없다는 상징적인 표현만으로도 충분하다.

배홍배 시인의 표현처럼 "우리나라의 모든 철길은 이곳으로 올라오고 다시 이곳으로부터 전국으로 내려가니' 그것으로 된 것이다. ([추억으로 가는 간이역] 193쪽에서)

 

 

추전역이 자리잡은 곳은 강원도 태백시 삼수동, 해발 1573m의 함백산 중턱이다.

맞은 편 매봉산(해발 1303m) 정상에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우뚝 서 있다.

가장 높은 역임에도 해발 1000m 이상의 연봉들이 즐비한 백두대간 한 복판에 있다보니 역설적으로 산 속에 아늑히 자리잡은 느낌을 준다.

 

 

산꼭대기 풍력발전기의 거대한 날개가 돌고 있었다.

서늘했다.

태백시내 곳곳에 붙어 있는 '열대야 없는 태백시'라는 홍보문구처럼 이곳은 일년내내 서늘하거나 추울 것이다.

 

 

대한석탄공사에서 기증한 광차가 역 마당에 전시되어 있다.

이곳도 대규모의 저탄장이 있지만 석탄산업의 쇠퇴와 함께 본래의 화물 수송기능은 잃고 말았다.

 

 

청량리발 강릉행 무궁화호 열차가 통과한다.

백두대간을 넘는 급경사의 선로를 달리다 보니 기차는 속도를 못내지만 본선 승강장이 워낙 좁아 위압적으로 다가온다.

 

 

본선 승강장은 구형 행선판이 지키고 있다.

오랫동안 이 자리에서 쇳가루를 뒤집어 썼기 때문일까 많이 녹슬어 있다.

어차피 강릉행 기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에게는 이 자리도 한 순간이다.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부본선쪽 승강장.

있는 지 없는 지도 모를만큼 많이 허물어졌지만 신CI 행선판이 이곳이 승강장임을 알려주고 있다.

정반대의 풍경이다.

낡은 승강장에는 신형 행선판, 콘크리트로 포장된 본선 승강장에는 구형 행선판.

 

 

방금 기차가 달려온 방향을 본다.

이곳이 가장 높은 역임에도 불구하고 기찻길은 계속 산 위를 향해 이어진다.

 

저 곳에는 한때 '우리나라 최고'라는 타이틀을 지녔던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정암터널이다.

두번째 사진의 추전역 소개에 '두번째 긴'이라는 글자는 나중에 고쳐진 것이니 분명 그 자리에는 '가장 긴'이라는 말이 새겨져 있었을 것이다.

 

길이 4505m로 한때 우리나라 최장터널의 지위에 있었지만 1999년 개통된 전라선 슬치터널(6128m)에 그 자리를 넘겨주었다.

게다가 경부고속철도가 개통되면서 길이 10km에 육박하는 황학터널이 출현했으니 이제 정암터널은 명함(?)도 내밀지 못하게 된 형국이다.

철교와 터널은 갈수록 길어지고 기차도 갈수록 빨라진다.

반대로 기차여행객이 차장을 통해 볼만한 풍경은 사라져 간다.

 

 

저 터널 속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기찻길'이 있다.

터널 속 최고점이 제천기점 86.139km 지점이고 구배표시로 대략 계산해보면 약 해발 880m정도 되리라 추정해본다.

그러나 늘 생각하지만 여행자에게 '숫자'는 무의미하다.

어차피 사방이 분간되지 않는 컴컴한 터널 속.

'가장 높은 기찻길을 지나간다'는 상징적인 체험이 중요한 것이다.

 

 

오래 전 제천발 영주행 통일호 열차로 이 승강장에 내려본 적이 있었다.

역마다 모두 정차하는 길고도 지루한 여행인데다 이곳에서 교행을 위해 5분간 정차했기 때문에 잠시 바깥 바람을 맞아볼 수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쇠락한 승강장 분위기는 똑같다.

더 이상 무너질만한 곳도 보이지 않는다.

 

 

추전역이 정작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환상선눈꽃순환열차가 힛트를 치던 1998년 무렵이다.

영동선 승부역과 이곳 추전역에 장시간 머물며 관광객들에게 오지와 간이역의 추억을 남겨주던 열차.

그러나 지금도 기차는 하루에 두번 멈출 뿐이며 더구나 제천-태백-영주 간을 운행하는 무궁화호이기 때문에 서울, 수도권 사람들에게는 늘 아득한 곳으로 남아있다.

추전역에 쉽게 갈 수 있는 방법은 관광열차 아니면 자가용 뿐인 것이다.

 

 

휴가철 막바지 징검다리 연휴때문이었는지 강원도로 가는 길은 하루종일 정체였다.

강원도에도 유난히 외지 차들이 눈에 많이 띄었고 이곳 추전역에도 심심치 않게 자동차를 타고 가족단위로 방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추전역은 '대합실'이나 '맞이방'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문화공간'이라는 팻말을 붙여놓았다.

가장 적합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기차를 타기 위해 오거나 기차에서 내리는 손님은 거의 없다.

한국에서 가장 높은, 아득한 곳에 있는 역을 구경하기 위해 잠시 들르는 사람들. 그들에게 험한 산 중턱의 간이역은 하나의 '문화'이다.

 

 

가장 높은 역을 통과한 기차는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제동경고' 표지판이 이곳 태백선에서는 흔하게 보인다.

저 굽이를 돌면 30퍼밀 내리막길이 약 5km 길이로 이어져 태백역으로 들어간다.

1km 갈 때마다 30m를 내려가니 자동차와 달리 제동력이 약한 기차에게는 험난하기만 한 길이다.

 

기차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올라가는 길이 힘든만큼 내려가는 길도 힘든 법이다.

오히려 높이 올라가는 것 보다 안전하게 내려오는 것이 살아가는데 더 중요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주위를 둘러보면 더 빨리, 더 잘 올라가려고 애를 쓰는 사람은 많지만 잘 내려갈 줄 아는 이는 드문 것 같다.

 

                                                  출처 : 네이버 블러그 기차와 함께 하는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