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묵상

순교자

그린빌나 2009. 10. 5. 09:45

  우리가 순교자를 기리는 것은 그들이 단순히 교회를 위해 목숨을 바쳤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은 교회를 통해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의 복음을 듣고 그분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그들은 자신과 자신들이 살고 있는 이 땅이 복음으로 변화되기를 바랐다.

드디어는 복음과 복음 전파를 위해 목숨을 내놓았다.
그분의 복음에서 무엇을 느꼈기에 그들은 조국의 복음화를 위해 목숨까지를 바쳤을까?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예수님의 복음은 당시 사회에서 그들이 아직 들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들이 받아들인 복음은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에 왔다고, 이 세상이 하느님 나라를 표현하고 있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를 살듯이 살라고, 모든 이를, 부자든 가난한 이든, 신분이 귀하든 비천하든, 높든 낮든, 여자든 남자든, 주인이든 종이든 모두를 하느님 대하듯이 대하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양반과 상놈, 귀와 천, 부와 가난, 위와 아래, 남자와 여자가 엄격히 구분되던 신분사회에 이 복음은 천지를 개벽하는 소식이었다. 상놈과 양반이 한 자리에 모여 앉아 한 형제자매처럼 기도하고 미사를 드린다는 것은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파격이었다. 그것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것은 그들에게 복음이었다.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모여들었다. 복음화되는 자신들을 바라보며 그들은 그 사회가 복음화 되기를 바랐다.
오늘날 우리가 순교자를 기억하면서 그분들의 순교를 현양하는 것은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그들의 순교정신을 절실히 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사회가, 이 조국이 복음화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종이라 불리는 관습이 없어지고, 가난한 자와 부자가 한데 어울려 살고, 빈부귀천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한 표씩 던지는 평등 사회가 된 듯하지만, 내용상으로는 어느 때보다 더한 차별 속에 살고 있다. 서울과 지방, 같은 서울이라도 강남과 강북의 격차가 벌어지고,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한 자가 되는 모순 속에서 가지지 못한 자와 힘없는 자의 인권은 그 어느 때보다 무참히 무시당하고 있는 현실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원화된 제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던 옛날에는 차별 속에서도 가진 자가 없는 자에게,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에게 베푸는 인정이 있었지만, 이 벽이 없어졌다는 오늘날에는 그런 정과 자비도 사라지고 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고 신도들의 수가 불어나지만 이들조차 그들 자신의 벽을 쌓기에 바쁘고 그리하여 소외당하는 사람들의 수도 늘어난다. 복음화도 수 불리기로 변질되어 간다.
이 사회는 복음화가 되어야 한다. 이 사회는 복음화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사람을 요구한다. 2백 년 전보다 더 많은 순교를 필요로 한다. 빈곤한 이가 더 이상 짓밟히지 않고, 변두리 인생이 더 이상 망하지 않고, 안식일이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남을 속이지 않는 날이 올 때까지(아모 8,4-6), 마음이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 날이 올 때까지(루카 16,13) 맘몬을 섬기는 날이  우리에게서 사라질 때까지 우리 사회는 순교를 필요로 한다.

                                                            - 이제민 신부님의 홈피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