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익은 벼는 익으면 고개를 숙입니다.
알이 꽉 차 무겁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짜 벼’는 고개를 숙이고 싶어도 숙여지지 않습니다.
‘알맹이’가 없는 탓입니다.
가을 들판이 되면 어디서나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대충 보더라도 어느 것이 가짜 벼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자리가 높아지면 웬만한 사람은 착각합니다.
자리가 높아지면 웬만한 사람은 착각합니다.
‘대단한’ 사람이 된 줄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사람은 ‘그대로’이고 자리만 높아진 것인데, 그걸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고개를 숙이려 하지 않습니다.
점차 ‘마음의 고개’도 숙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뻣뻣한 사람’으로 바뀌어 갑니다.
‘알맹이 없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이 많을수록 가짜가 판치는 세상이 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복음 말씀도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복음 말씀도
‘자리의 유혹’을 경계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니 ‘현대판 바리사이’는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섬김의 자리에 앉았건만 ‘섬김을 받으려’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하여 다른 이들을 ‘자신의 판단’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낮추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낮추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어의 이해한다는 말은 ‘언더스탠드’(understand)입니다.
직역하면 ‘아래에 서다’이지요.
상대에게 맞추어야 이해가 가능해진다는 암시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에 ‘어울리게’ 사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런 사람은 어떤 자리에 가든 고개를 숙입니다.
아무도 그런 사람을 가벼이 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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