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일상도

나주나씨

그린빌나 2010. 4. 16. 10:23

나주나씨(羅州羅氏)에 대(對)하여

 

 

1. 시조 및 연원(羅州羅氏 淵源)

 

나주나씨(羅州羅氏) 시조(始祖)는 고려중엽(高麗中葉)에 중국(中國)의 예장(豫章)에서 동도(東渡)하신 부공(富公)이다. 중국인(中國人)은 모두 염제(炎帝)와 황제(黃帝)의 후손(後孫)이며 나씨(羅氏)는 황제(黃帝)의 후손(後孫)이다. 황제(黃帝)의 후손(後孫) 광정공(匡正公)이 주(周)나라에서 공(功)을 세워 나국(羅國)(현 방주)에 봉(封)해졌으므로 국명(國名)을 따라 나씨(羅氏)라는 성(姓)을 최초(最初)로 갖게 되었고, 그의 후손(後孫) 주공(珠公)이 한(漢)나라 초(初)에 대공(大功)을 세워 예장군(豫章郡)(현 남창부)에 봉(封)해졌으므로 예장나씨(豫章羅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부공(富公)은 중국(中國) 북송(北宋) 예장(豫章)사람으로 金나라의 침입(侵入)으로 나라가 위급(危急)해 지자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고려(高麗)에 왔다가 북송이 멸망(서기 1127년)함에 본국(本國)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고려에 귀화(歸化)하였으며, 전라도(全羅道)의 여황(艅황)이란 곳에 정착(定着)하였는데, 어질고(累仁) 덕(德)을 많이 베풀었으므로 호남(湖南)의 망족(望族)이 되었다고 문헌에 전해오고 있다.

 

 

부공(富公)은 고려조(高麗朝)에서 감문위상장군(監門衛上將軍)이란 직책(職責)을 받으셨다. 감문위(監門衛)는 중앙군(中央軍)의 일부로서 궁성(宮城)의 수비(守備)를 담당(擔當)하는 부서이고 상장군(上將軍)은 그 부서(部署)의 책임자로서 품계는 정삼품(正三品)인 정의대부(正議大夫)이다. 외국인에게 군의 고위직(高位職)을 제수(除授)하였다는 것은 부공(富公)이 송(宋)나라에서 명망(名望)있는 무장(武將)이었음을 의미(意味)하고 있다.

 

 

시조부공(始祖富公) 과 가장 근접한 실존인물은 남창(南昌)옛 예장(豫章)일대(一帶)에 세거(世居)하는 나씨들의 파보인 백림파보(栢林派譜)와 예장라씨 대성보(豫章羅氏大成譜)에 나오는 라부(羅富)이다. 라부(羅富)는 족보명은 인노(仁老)라 하며 자(字)가 부(富)로 이는 관명(官名)이었다. 라부(羅富)는 1063년에 출생하였으며, 평향현(萍鄕縣)(강서성 소재)의 현령(縣令)을 하다가 대관(大觀) 2년(서기 1108년)에 무기위(武騎尉)가 되었고, 봉의랑(奉義郞)을 거쳐 세직(世職)으로 알려진 운기위(雲騎尉)가 되었다. 따라서 라부(羅富)는 나주나씨의 시조인 부(富)와 활동연대와 이름이 같을 뿐만 아니라 북송(北宋)이 滅亡時(1127년)는 65세의 문무(文武)를 겸(兼)한 인물(人物)이었다. 그리고 夫人의 장지(葬地)는 족보상(族譜上)에 기록(記錄)되었으나 정작 본인(本人)의 장지(葬地)에 관해서는 기록(記錄)이 없다는 점등이 동도설(東渡說)을 뒷받침하고 있다

 

 

나주나씨의 관향(貫鄕)이 나주로 정해진 것은 조선초기(朝鮮初期)로 보여진다. 이는 조선조 초에 여황현이 폐현(廢縣)되고 나주에 합병되었기 때문이다. 과방록(科榜錄)에 세종조(世宗朝)에 급제한 나득강(羅得康)이 최초로 나주인으로 명기되므로서 조선초기(朝鮮初期) 이후에 관향이 나주로 결정(決定)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 恭愍王 원년에 급제한 羅世는 先祖가 中國에서 왔으며 당시 중국은 원(元)나라였으므로 고려사에 원인(元人)이라 기록(記錄)하였고, 공민왕(恭愍王) 11년에 급제한 라중우(羅仲佑) 라석(羅碩)의 장자(長子)이며 라득강(羅得康)의 부친(父親)는 과방록에 관향(貫鄕)을 명시(明示)하지 안았다.

 

나주나씨는 부공을 시조로 하고 득규공(得규公)을 후1세(後1世)로 하여 세계(世界)를 이어오고 있다. 후1세 득규(得규), 후2세 중윤(仲潤), 후3세 송기(松奇), 후4세 수영(守永)까지는 독자(獨子)로 내려오다가 수영(守永)이 위,계,석,세,원(位,桂,碩,世,源) 등 5형제를 두었는데, 이분들은 모두 고려말에 관직에 나갔으며 각각 5대파조(五大派祖)가 되었다.

 

 

나주나씨는 이들 다섯분의 후예(後裔)들로서 자손이 전국각지에 번창(繁昌)하고 학행덕업(學行德業)이 근 1000년 동안 끊이지 아니하여 많은 인재들이 문·무과(文·武科)에 등과(登科)하였고, 충·효·열(忠·孝·烈)과 애국지사(愛國志士)들이 배출(輩出)되었으며, 오늘날에도 부총리(副總理), 장관(長官), 대법관(大法官), 외교관(外交官), 대학총장(大學總長), 국회의원(國會議員)등 많은 활동가들이 속출(續出)하여 국가 및 사회발전에 공헌(貢獻)하고 있고, 그 자손들이 10만여명에 이르고 있다.

 

 

 

2. 나주나씨 인물

 

 

고려시대(高麗時代)

 

◈ 나세(羅世)

나세는 외침이 잦았던 고려말에 무장으로서 맹활약을 하였으며, 특히 왜구격퇴에 공이 많았으며 연안군에 봉해졌다. 특히 우왕(禑王) 6년에 해도원수(海道元帥) 나세(羅世)는 상원수(上元帥) 심덕부(沈德符)는 서해도원수(西海道元帥)·부원수(副元帥) 초무선(崔茂宣)은 화통도감 제조(火筒都監 提調) 등과 함께 고려연합함대인 전함 100척으로 왜선 500척을 완파하여 왜구의 기세를 크게 꺾은 진포대첩(鎭浦大捷)을 총지휘(總指揮)하였고, 그 뒤 문화평리(門下評理)가 되었다가 왜구가 다시 득세하여 수도 개성을 위협하자 수도방위의 좌일선인 東江(임진강) 都元帥를 지냈으며, 다시 해도원수를 맡았을시에는 동해에 있는 축산도(丑山島) 출동명령에 불복하다가 투옥되기도 하였다. 당시 고려함대가 축산도로 출동하려면 왜구가 장악하고 있는 남해안을 통과하여야 하였다. 이 사건은 훗날 한산도에 있던 이순신 장군이 부산포 출동명령을 거부하다가 투옥되는 상황의 선례가 되었다. 나세는 조선조에서는 문하부참찬을 지내다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사직하였다. 그러다가 왜구가 다시 서해안까지 침범하매 태조2년에 왕명을 받고 74세의 고령으로 출전하였다가 태조 6년에 78세로 군영에서 순직하였다.

 

 

◈ 나중우(羅仲佑)

호는 낙천와(樂天窩), 공민왕때 급제, 전교시령, 예문관 지제고, 춘추관 편수관 등을 역임하였으나 고려의 국운이 다하고 조선조가 개국하매 공은 절의를 지켜 김제로 낙향하였다. 이에 태조 이성계가 우의정으로 세차례나 불렀으나 “忠臣은 不事二君”이라 하면서 조정에 나가지 안았다.

 

•나 부(羅富) : 始祖 羅州羅氏淵源에서 說明

•나득규(羅得규) : 後1世 高麗 令同正

•나중윤(羅仲允) : 2世 高麗 令同正

•나송기(羅松奇) : 3世 高麗 令同正

•나수영(羅守永) : 4世 高麗 진사(進士)

•나 위(羅位) : 호조전서(戶曹典書)

•나 계(羅桂) : 중서시랑(中書侍郞)

•나 석(羅碩) : 금양군(錦陽君)봉작(封爵)

•나 세(羅世) : 연안군(延安君) 앞에서 별도 설명

•나 원(羅源) : 사온서직장(司온署直長)

•나동길(羅東吉) : 증주목사(甑州牧師)

•나경세(羅經世) : 감역(監役)

•나중우(羅仲佑) : 樂天窩公 神道碑에서 별도 說明

•나 진(羅璡) : 공조전서(工曹典書)

•나공언(羅公彦) : 羅城君 不조廟에서 별도 說明

조선시대(朝鮮時代)

 

삼세팔효(三世八孝)

삼세8효란 한 집안에서 3대에 걸쳐 8명의 효자가 탄생한 것을 말한다. 錦陽君派 후9세 생원공 나보중(羅甫重)의 장자로 式年試 甲科에 及第한 나안세(羅安世), 차자 나안인(羅安仁), 4자 나안의(羅安義)와 나안세의 장자 나응허(羅應虛), 차자 나응삼(羅應參), 그리고 나응허의 차자 나의(羅의), 나응삼의 장자 나표(羅表), 나안세의 3자인 나응정(羅應井)의 2자 나계(羅계) 등 한 집안에서 3代에 걸쳐 8명이 효행으로 조정으로부터 정려(旌閭)를 받거나 참봉벼슬 또는 은전(恩典)을 받았다. 한 집안에서 3대에 걸쳐 효자 8명이 탄생한 것은 동서고금에 처음 있는 일로서 삼세팔효를 기리기 위하여 김제시 신풍동 내기마을에 팔효사(八孝祠)가 세워져 있다. 지금 팔효사에는 순조(純組)시 효자로 명정(命旌)된 나한명(羅漢明)이 추배(追配)되어 있는데, 이는 그가 효자로 명정되었을뿐 아니라 흩어진 자료를 모아 팔효집(八孝集)을 완성하였기 때문이다.

 

•삼세팔정(三世八旌)

삼세팔정이란 한 집안에서 3대에 걸쳐 8명이 3강(三綱)인 충(忠), 효(孝), 열(烈)로 조정으로부터 정려(旌閭)를 받은 것을 말한다. 直長公派 후12세 나질(羅질)의 아들 금호공(錦湖公) 나사침(羅士침)은 孝로, 나사침의 장자 나덕명(羅德明)은 忠으로, 6자 나덕헌(羅德憲)도 忠으로, 나사침의 여식(尹沆의 妻)은 烈로, 4자 나덕현의 처 하동정씨(河東鄭氏)도 烈로, 그리고 나사침의 4자 나덕현(羅德顯)의 3자인 나득소(羅得素)는 孝로, 나사침의 2자 나덕준(羅德峻)의 여식(金礁의 妻)은 烈로, 나덕헌의 장자 나수소(羅守素)의 처 언양김씨(彦陽金氏)도 烈로 조정으로부터 정려를 받았다. 이와 같이 한 집안에서 3대에 걸쳐 8명이 충·효·열(2충·2효·4열)로 명정(命旌)된 일도 드믄 일이다. 나주시 남내동에는 삼세팔정의 시작인 나사침의 효행과 덕망을 기리기 위하여 도내유림(道內儒林)이 나사침의 호를 딴 금호사(錦湖祠)를 세웠고, 그 부근에는 삼세팔정을 기리기 위하여 충,·효·열을 의미하는 삼강문(三綱門)을 세웠다. 금호사에는 금호공 나사침뿐만 아니라 그의 여섯아들이 모두 모셔져 있다.

 

•나안세(羅安世)

호(號)는 건계(建溪) 금양군파로 孝를 重히 여긴 나보중(羅甫重)의 장자로 중종시 식년시(式年試, 3년간격으로 치르는 정기과거시험) 갑과(甲科, 優秀合格者)에 급제, 승문원 교리와 외부헌부관 등을 역임하다가 기묘사화를 체험하면서 회의를 느껴 사직하였다. 건계공은 효를 대변하는 삼세팔효의 시작이다. 공은 모친이 병환으로 눕자 주야로 탕약을 올렸으며, 천명이 다하매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고 3년간 여묘살이를 하였다. 여묘3년 후에도 부친이 돌아가셨을 시 어려서 상복을 하지 못했음을 애통해 하여 추가로 상복을 입고 시묘하였다. 그런데 이 때 묘소 주변의 소나무를 송충이 먹으매 공이 이를 잡아 깨물며 하늘을 우러러 애통하니 천둥소리와 번개가 치고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므로 송충이 모두 떨어져 죽으매 소나무가 푸르러졌다. 공이 효제충신(孝悌忠信)이란 네글자를 남기고 죽으매 주변에서 남주고사라 하였고, 그의 효행을 나라에 추천하였으므로 효자가 되었다.

 

•나사침(羅士침)

호(號)공호(錦湖) 직장공파로 증 호조참판 질(질)의 제삼자로 中宗乙酉(1525)년에 태어나셨다. 어려서부터 性이 至孝하였으며 16세 때에 母夫人의 병환이 위독하자 공은 혈지화약(血指和藥)하여 괘유(快癒)하였다. 中宗 임금께서 그 사실을 듣고 나사침의 행실이 매우 가상하니 포장(포章)을 할 것을 이조로 하여금 대신과 의론하게 하라 하여 정려(旌閭)와 복호(復戶)를 명하였다. 성장하자 이소제 이중호(履素齊 李仲虎)의 문하에 입문 수학하였으며 명종 10년(1555)에 국자감의 학생으로 진사과에 합격하였다. 宣祖 원년(1568) 전라감사 송찬이 나주목사 한복이 추천한 다섯 사람을 발탁하여 조정에 서계를 올렸는데 공에 대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서계의 원문에는 “나주고을 생원 나사침은 어미의 병구완을 위해 손가락을 끊어 쏟아지는 피를 물에 타 드리니 병이 곧 나았는데 이미 中宗 임금께서 그 사실을 듣고 정려(旌閭)를 내렸습니다. 나사침은 성품(性品)이 진실(眞實)하고 순후(淳厚)하며 학문과 행실을 모두 갖추어 그르다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긍휼(矜恤)히 여겨 구제(救濟)하였으며 父母모시기에 각별하였으며 일찍이 과거공부를 폐하여 출세를 구하지 않으니 온 고을사람들이 그의 행실에 감복(感服)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그를 아름답게 여겨 경기전 참봉을 제수하였으며 이어서 선릉 참봉에 제수 되었고 다시 금오랑에 제수되었으며 종묘서직장을 거처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로 승진하였다. 선조17(1584)년에 이성현감으로 부임하시어 시정(施政)이 청간(淸澗)하여 병폐(病弊)를 혁신(革新)하고 세력이 강한 자는 억제(抑制)하고 가난한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니 방백(方伯)에게 거슬린바 되어 마침내 고하파귀(考下罷歸)하니 백성들이 “입석각시“(立石刻詩)하여 유애(遺愛)를 기렸다고 한다. 선조29년(1596)에 세상을 떠나시니 향년72세였다. 뒤에 세아들의 책훈(策勳)으로 누증(累增)되어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이르렀다.

 

•나덕명(羅德明) : 호는 嘯浦, 소포공파 파조, 錦湖公 諱 士침의 장남으로 29세(1579)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승훈랑 의금부 도사를 지냈다. 39세(1589)때 정여립의 모반을 계기로 일어난 기축옥사에서 위관 정철이 곤재 정개청과의 사감을 앙갚음하면서 공이 정개청의 문하생이니 정여립 일당과 가깝다고 무고하여 함경도 경성으로 유배되었다. 42세(1592)때 유배지에서 임란을 겪는데, 왜장 가등청청군이 회령에 육박하자 관노 국경인 등이 작란하여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 및 수행신하들을 포로로 적에게 넘기니 공이 분연히 평사 鄭文孚 등과 의병을 일으켜 모반을 평정하고 왜군을 여러번 격퇴시켰다. 44세((1594)에 사면되어 나주로 귀향하였고, 46세(1596)에 아버지 금호공이 돌아가심에 무안 주룡에 안장하고 시묘살이를 하면서 스승 정곤재께서 죄 없이 유배지로 끌려가시다가 죽음을 당하셨다 하여 신원(伸寃)을 청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같은 해 丙申封事라는 상소를 올려 정철의 죄상을 매도하고 민심결집을 위해 부역을 고르게 메기고 각 군영의 둔전을 정비할 것을 건의하였다. 47세(1597) 정유재란때는 시묘살이중임에도 임판서 담과 창의하여 전남 화순, 동북지방에서 왜적을 물리쳤다. 1803년, 조정에서는 나덕명이 경성에서 귀양살이중에 평사 정문부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친 공을 인정하여 忠臣으로 旌閭하였다. 주룡에 충신각을 건립하고 도내 사림이 소포사를 세워 제사를 지내오다 1868년 서원철페조치로 훼철되어 지금까지 복원을 못하고 있다. 현재는 금호사, 충장사, 금곡사, 영렬사, 현충사에 배향되어 있다. 공께서는 규흘사업에도 힘 쓰셨으니 인의산 아래 간척지를 조성하여 가난한 농민들에게 경작하도록 하였는데, 이곳을 지금도 소포들이라고 부른다.

 

•나덕헌(羅德憲)

시호(諡號)는 충렬공(忠烈公)으로 금호공(錦湖公) 나사침(羅士침)의 6자로서 무과에 급제하여 부안현감, 의주판관, 정주목사, 의주부윤 등 여러관직을 거쳤으며,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고, 형조참의와 접반사로 2회나 만주를 다녀왔고, 통신사로 3회나 청나라 심양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1636년 봄에 청에 갔을 때 청의 칸(汗)이 황제라 칭하고 축하참배를 강요하매 이를 거절하다가 칸으로부터 심한 형벌을 받았으며,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귀국하였다. 그런데 고국에서는 나덕헌이 청황제에게 굴종하였다고 무고하여 극형의 위기를 맞기도 하였으나 겨우 구명되어 참형을 면하고 유배를 당하였다. 그 후 여러 경로로 나덕헌의 행적이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청의 침공으로 삼전도에서 항복시 청태종이 인조에게 “나덕헌이 편안한가? 전에 고통스러운 형벌에도 굴복하지 않았는데 오늘 보이지 않는구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淸太宗에 의해 그의 행적이 확연히 입증되자 인조는 그를 특사하고 고향에 가서 상처를 치료토록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인조는 공에게 충렬(忠烈)이란 시호(諡號)를 내리고 부조묘(不조廟,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주(神主)를 영원히 사당에 모시고 제사지내게 하는 特典)를 命하였다.

 

•숙의 나씨(淑儀 羅氏)

금양군파, 괴산군수 나숙담(羅叔聃)의 二女, 中宗後宮으로 입궐하여 숙의(淑儀)가 되어. 王子를 出産하다가 난산으로 26세에 왕자와 함께 사망하였다. 羅淑儀의 사망은 “내간(內間)이 박씨(박소의를 말함. 박씨는 당시 최고권력자 박원종의 양녀로 후에 경빈(敬嬪)이 됨)에게 아부(阿附)하면서 나씨를 전혀 구호하지 안았다”는 기록과 의녀(醫女)와 의원(醫員) 등 관련자를 처벌하여야 한다는 헌부(憲府),정원(政院),대간(臺諫) 등의 주청으로 보아 이미 복성군(福城君)을 출산했을 뿐만 아니라 임신중인 박소의(朴昭儀)의 농간으로 보였다. 헌부 등의 주청내용과 “내간이 박씨에게 아부하였다”는 기록 등은 원자(元子)가 출생하기 전이어서 박씨가 왕위계승 경쟁자를 미리 제거하려고 막강한 권세를 활용하였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나시용(羅時鏞) :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

•나윤문(羅允文) : 무과 어모장군(武科 禦侮將軍)

•나여을(羅汝乙) : 선조 戊辰 어모장군(禦侮將軍)

•나몽건(羅夢乾) : 숙종 丙辰 절충장군(折衝將軍)

•나종선(羅宗善) : 숙종 丙辰 통정대부(通政大夫)

•나종일(羅宗逸) : 숙종 丙辰 가선대부(嘉善大夫)

•나 신(羅紳) : 태종조 세마호조참판(洗馬戶曹參判)

•나사고(羅師古) : 세종조 형조판서(刑曹判書)

•나치온(羅致溫) : 광주유수(廣州留守)

•나효신(羅孝信) : 성종 壬子 호조참의(戶曹參議)

•나윤보(羅允寶) : 중종 乙未 시강원보덕(侍講院輔德)

•나사량(羅士良) : 선조조 승정원 승지(承政院 承旨)

•나수의(羅守義) : 선조 戊子 어모장군(禦侮將軍)

•나 협(羅협) : 조선조 군자감정(軍資監正)

•나재흥(羅再興) : 현종조 병마우후(兵馬虞候)

•나성기(羅成起) : 조선 인조조 중추부사(中樞府事)

•나 회(羅繪) : 선조 庚申 군자감정(軍資監正)

•나필위(羅弼位) : 숙종조 호조참의(戶曹參議)

•나성진(羅星軫) : 조선조 어모장군(禦侮將軍)

•나인규(羅仁奎) : 숙종조 절충장군(折衝將軍)

•나황호(羅璜浩) : 순조조 절충장군(折衝將軍)

•나명우(羅明佑) : 정종조 병조판서(兵曹判書)

•나진강(羅晉康) : 태조조 해남현감(海南縣監)

•나치강(羅致康) : 태조조 곡성현감(谷城縣監)

•나득강(羅得康) : 세종조 시강원 찬선(侍講院 贊善) 이조판서(吏曹判書)

•나 준(羅俊) : 세종조 한성판윤(漢城判尹)

•나안세(羅安世) : 중종조 식년시(式年試) 甲科及第, 곡성현감(谷城縣監), 교리(校理), 팔효사에서 별도설명.

•나영의(羅永義) : 조선조 좌부승지(左副承旨)

•나사의(羅士義) : 세종조 한성판윤(漢城判尹)

•나 은(羅殷) : 조선조 이천부사(伊川府使)

•나숙담(羅叔聃) : 조선조 괴산군수(槐山郡守)

•나윤철(羅允哲) : 중종조 용인현감(龍仁縣監)

•나윤명(羅允明) : 중종조 시강원 보덕(侍講院 輔德) 명종조 상의원정(尙衣院正)

•나 흡(羅恰) : 중종조 시강원 보덕(侍講院 輔德)

•나 협(羅협) : 선조조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

•나 순(羅恂) : 명종조 풍덕군수(豊德郡守)

•나홍지(羅弘智) : 조선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나신도(羅伸道) : 선조조 병마우후(兵馬虞侯)

•나정언(羅廷彦) : 선조조 진주목사(晉州牧師)

•나 환(羅환) : 조선조 절충장군(折衝將軍)

•나효윤(羅孝胤) : 조선조 감역(監役)

•나효원(羅孝元) : 조선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使)

•나팔기(羅八紀) : 효종조 대구영장(大邱營將)

•나 환(羅煥) : 숙종조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

•나 훈(羅燻) : 조선조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나순복(羅舜福) : 조선조 군자감정(軍資監正)

•나무상(羅武相) : 조선조 가선대부(嘉善大夫)

•나천희(羅天希) : 조선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나인서(羅仁瑞) : 조선조 절충장군(折衝將軍)

•나후광(羅厚光) : 조선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나응해(羅應海) : 조선조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

•나두함(羅斗咸) : 조선조 호조참의(戶曹參議)

•나홍현(羅弘鉉) : 조선조 절충장군(折衝將軍)

•나천유(羅天維) : 숙종조 무과 첨사(武科 僉使)

•나흥술(羅興述) : 조선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나수일(羅守逸) : 조선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나성추(羅星樞) : 조선조 첨절제사(僉節制使)

•나처대(羅處大) : 조선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나명지(羅明之) : 조선조 공조참의(工曹參議)

•나기재(羅杞材) : 고종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나치명(羅致明) : 조선조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

•나두흥(羅斗興) : 조선조 중추부사(中樞府事)

•나만경(羅萬景) : 조선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使)

•나형좌(羅衡佐) : 조선조 군자감정(軍資監正)

•나성엽(羅成燁) : 조선조 절충장군(折衝將軍)

•나일엽(羅日燁) : 조선조 선공감역(繕工監役)

•나일현(羅一鉉) : 조선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나영환(羅永煥) : 조선조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나재현(羅在鉉) : 고종조 호조참의(戶曹參議)

•나춘경(羅春絅) : 조선조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나익진(羅益鎭) : 조선조 에조참판(禮曺참判)

•나응위(羅應緯) : 조선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나광춘(羅光忠) : 조선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나봉식(羅奉桓) : 조선조 공조참의(工曹參議)

•나세채(羅世采) : 조선조 한성판윤(漢城判尹)

•나언진(羅彦鎭) : 조선조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나학손(羅學孫) : 조선조 한성좌윤(漢城左尹)

•나운하(羅雲夏) : 조선조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나영규(羅永奎) : 조선조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나치형(羅致亨) : 조선조 곽산군수(郭山郡守)

•나항순(羅恒淳) : 조선조 절충장군(折衝將軍)

•나대석(羅大錫) : 조선조 절충장군(折衝將軍)

•나명대(羅明大) : 조선조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

•나인갑(羅인甲) : 조선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나근동(羅近東) : 조선조 호조참판(戶曹參判)

•나순명(羅淳明) : 조선조 동지오위장(同知五衛將)

•나희근(羅喜謹) : 조선조 공조참의(工曹參議)

•나진기(羅鎭基) : 조선조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

•나대학(羅大學) : 조선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나성균(羅誠均) : 조선조 예조참의(禮曺參議)

•나형모(羅亨模) : 조선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나영권(羅永權) : 조선조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

•나찬기(羅燦箕) : 조선조 공조참의(工曹參議)

•나병묵(羅炳묵) : 조선조 형조참의(刑曹參議)

•나병수(羅炳壽) : 조선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나찬환(羅燦煥) : 조선조 절충장군(折衝將軍)

•나의균(羅義均) : 조선조 오위장(五衛將)

•나학균(羅鶴均) : 조선조 이조참의(吏曹參議)

•나채균(羅彩均) : 조선조 오위장(五衛將)

•나영성(羅榮城) : 조선조 오위장(五衛將)

•나인주(羅仁柱) : 조선조 호조판서(戶曹判書)

•나현손(羅晛孫) : 중종조 현감(縣監)

•나순민(羅舜民) : 현종조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

•나중생(羅仲生) : 효종조 도호부사(都護府使)

•나세웅(羅世雄) : 조선조 한성좌윤(漢城左尹)

•나성신(羅星信) : 조선조 한성좌윤(漢城左尹)

•나준백(羅俊伯) : 조선조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나익선(羅益善) : 조선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

•나이재(羅以載) : 조선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나용봉(羅龍鳳) : 조선조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나천두(羅天斗) : 통훈대부. 상의원첨정(尙衣院僉正)

•나만원(羅萬元) : 조선조 한성좌윤(漢城左尹)

•나상현(羅相賢) : 조선조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나광교(羅光敎) : 조선조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나희득(羅禧得) : 영조조 이조참의(吏曹參議)

•나한규(羅漢奎) : 조선조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

•나영화(羅永貨) : 정종조 군자감정(軍資監正)

•나원양(羅元亮) : 조선조 절충장군(折衝將軍)

•나명성(羅明星) : 조선조 공조참의(工曹參議)

•나봉순(羅鳳順) : 조선조 훈련원참정(訓練院僉正)

•나하순(羅夏淳) : 조선조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나 설(羅設) : 태종조 강진현감(康津縣監)

•나 집(羅집) : 태종조 식목도감녹사(式目都監錄事)

•나자강(羅自康) : 태종조 무안현감.의주부윤(義州府尹)

•나현손(羅晛孫) : 조선조 음성현감(陰城縣監)

•나성손(羅誠孫) : 조선조 수원부사(水原府使)

•나 창(羅昶) : 중종조 세자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

•나 질(羅질) : 중종조 연일.진원현감(珍原縣監)

•나 면(羅冕) : 중종조 대정현감(大靜縣監)

•나 영(羅暎) : 조선조 이성현감(利城縣監)

•나 찬(羅纘) : 조선조 이성현감.통영우후(統營虞侯)

•나사율(羅士慄) : 명종조 긍천현감(矜川縣監)

•나사선(羅士선) : 중종조 성주목사(星州牧使)

•나사돈(羅士惇) : 조선조 충순위.어모장군(禦侮將軍)

•나사침(羅士침) : 선조조 이성현감(尼城.縣監)

•나사척(羅士척) : 선조조 충순위.어모장군(禦侮將軍)

•나덕준(羅德峻) : 선조조 보은현감(報恩縣監)

•나덕윤(羅德潤) : 선조조 왕자사전(王子師傳)

•나덕신(羅德愼) : 선조조 무장.영암군수(靈岩郡守)

•나덕헌(羅德憲) : 인조조 삼도통어사(三道統御使)

•나맹례(羅孟禮) : 명종조 문과.대구부사(大邱府使)

•나윤소(羅允素) : 선조조 황해.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나계소(羅繼素) : 선조조 첨지중추부사.오위장(五衛將)

•나위소(羅緯素) : 선조조 경주부윤(慶州府尹)

•나회소(羅繪素) : 선조조 도호부사.함안군수(咸安郡守)

•나 담(羅聃) : 인조조 태인.금구현감(金溝縣監)

•나 성(羅성) : 인조조 무과.어모장군(禦侮將軍)

•나 균(羅균) : 인조조 절충장군(折衝將軍)

•나 선(羅선) : 인조조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

•나진충(羅進忠) : 조선조 어모장군(禦侮將軍)

•나웅천(羅斗天) : 인조조 웅천현감(熊川縣監)

•나두시(羅斗時) : 조선조 절충장군(折衝將軍)

•나두삼(羅斗三) : 현종조 태인현감(泰仁縣監)

•나두선(羅斗璇) : 효종조 절충장군(折衝將軍)

•나인웅(羅仁雄) : 숙종조 절충장군(折衝將軍)부호군

•나두위(羅斗위) : 조선조 절충장군(折衝將軍)부호군

•나두거(羅斗居) : 조선조 무과.보공장군(保功將軍)

•나상규(羅祥奎) : 조선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나취규(羅聚奎) : 인조조 어모장군(禦侮將軍)

•나윤증(羅允徵) : 조선조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

•나만재(羅晩齋) : 조선조 절충장군(折衝將軍)첨재사

•나진호(羅進昊) : 조선조 어모장군(禦侮將軍)

•나학해(羅學海) : 조선조 공조참의(工曹參議)도총관

•나문철(羅文哲) : 조선조 참군.은성현감(穩城縣監)

•나윤좌(羅允佐) : 조선조 절충장군(折衝將軍)별호군

•나문채(羅文彩) : 조선조 절충장군(折衝將軍)부호군

•나응순(羅應純) : 헌종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나응소(羅應素) : 조선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나호성(羅虎成) : 조선조 오위도총부.오위장(五衛將)

•나 황(羅璜) : 조선조 중추부사.오위도총관(都摠管)

•나석항(羅錫恒) : 조선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나학영(羅學泳) : 조선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나학소(羅學素) : 조선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나인환(羅仁煥) : 조선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나홍주(羅弘周) : 조선조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나 곤(羅崑) : 조선조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나홍의(羅弘毅) : 조선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나성화(羅性和) : 조선조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나봉화(羅鳳華) : 영조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나 춘(羅春) : 조선조 오위장(五衛將)

•나관수(羅寬洙) : 조선조 절충장군.오위장(五衛將)

•나사증(羅師曾) : 조선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나면구(羅冕龜) : 조선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나수집(羅繡集) : 조선조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나예집(羅禮集) : 조선조 절충장군(折衝將軍)부호군

•나문집(羅문集) : 조선조 절충장군.오위장(五衛將)

•나은집(羅恩集) : 조선조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나기원(羅基元) : 조선조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나기정(羅基貞) : 조선조 시흥.용인군수(始興.龍仁郡守)

•나연집(羅衍集) : 조선조 선공감역(繕工監役)

•나기현(羅基賢) : 조선조 군자감정(軍資監正)

•나영집(羅榮集) : 조선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나도정(羅燾貞) : 조선조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나성대(羅成大) : 조선조 오위장(五衛將)

•나봉균(羅鳳均) : 고종조 완도군수(莞島郡守)

•나종준(羅鍾駿) : 조선조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3. 집성촌

충남 서천군 마서면 남전리, 옥산리

전남 영암군 시종면 만수리

전북 김제군 김제읍 용동리

전남 무안군 삼향면 유교리

제주도 남제주군 일원

 

 

4. 분파(分派), 계파(系派)

전서공파(典書公派)

시랑공파(侍郞公派)

금양군파(錦陽君派)

연안군파(延案君派)

직장공파(直長公派) 병사공파

 

 

3. 항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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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32

항렬자

균 규 기

종 옥 정

영 수 철

상 영 정

엽 희 열

중 현 재

선 탁 일

문 호 홍

行列子

均 圭 基

鍾 鈺 錠

永 洙 澈

相 榮 楨

燁 熙 然

重 玹 在

善 鐸 鎰

汶 浩 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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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35

36

37

38

39

40

41

42

항렬자

표 근 주

용 찬 형

배 곤 기

은 철 용

영 태 식

병 평 채

휴 렬 걸

 

 

 

行列子

杓 根 柱

容 燦 炯

培 坤 起

銀 鐵 鎔

泳 泰 湜

柄 枰 采

烋 烈 杰

 

 

 

 

4. 인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나주나씨는 33,600가구 총 108,139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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