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강론

예수회 강론(1)

그린빌나 2012. 10. 12. 13:47

자연주의 작가 알프레드 러셀 월레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누에고치에 관해서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번은 이 사람이 번데기를 바라보고 있는데 번데기에서

나비가 이제 막 생성돼 나오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나비가 다 나왔는데 한 쪽 날개가 번데기

에 걸려 가지고 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나비가 날개를 빼려고 안간힘을 다하여 파르

떨고 있는 겁니다. 그 사람이 너무 안쓰러워서 칼로 번데기를 약간 찢어줬습니다. 그러니까

날개가 금방 나왔습니다. 나비가 나와서 쉽게 날아 다닙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색깔이

다른 바둑이 날개예요. 왼쪽 날개하고 오른쪽 날개의 색깔이 다른 바둑이 날개였습니다. 자기

힘으로 빼낸 한 쪽 날개는 굉장히 아름다운데, 칼로 찢어서 나온 날개를 보니까 색깔이 푸르

죽죽한 게 영 시원찮았습니다. 색깔이 나오다 만 거죠. 그 뿐만 아니라 그 날개가 시원치 않아

서 찌뿌둥하게 날아 다니다가 결국 오래 살지 못하고 일찍 죽어버렸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사람이 자연에 손을 댔기 때문입니다. 자연이란 고통을 통해 또 와해를 통해

그리고 또다시 합함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창출해 내는데. 이 사람이 고통의 순간을 덜어준다

고 찢어버려서 그 날개 빛도 바래고 잃어버리고 그 생명마저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사람도 비슷합니다. 아기도 엄마가 아홉 달을 뱃속에 넣고 다니다가 나올 때는 산모의 큰 고통

에 8시간 9시간 어떤 사람을 열 몇 시간씩 진통을 한 후에야 아기가 나옵니다. 빨리 나오라고

의사가 베어 버리고 나면 기형아가 되는 거죠. 또 늦게 나와도 기형아가 되지요. 적당한 시간에

적당한 고통을 동반해서 나올 때 싱싱하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빛깔을 가진 아기가 탄생합니다.

자연은 고통을 통해서 생명을 창출해 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에 우리는

칼로 찢어 가지고 고통을 덜게 해 주려고 노력합니다만, 그것이 오히려 어린이가 자라는데 방해

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 날개가 빛을 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생도 이와 같은 경우가 많습니다. 행복이란 즉 인생의 아름다운 색상과 무늬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행복은 산 너머 있다고 합니다 산 넘어 또 산 넘어 또 산 나머에 멀

리 있다고들 합니다. 아무도 행복에 도달했다고 큰소리 칠 수가 없습니다. 행복은 이 세상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상에서 얻어진다고 사람들이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의 완성

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상에서 이루어질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행복은

우리가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 이미 행복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이해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바로 진복팔단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참된 복을 얻는 게

무엇인가. 행복이란 또 무엇인가. 즉 행복으로 가는 이야기입니다. 영국의 자연주의 작가

 Longfellow가 ‘행복이 산 넘어 있다기에 산 넘어 가니, 행복은 산 너머 있지 아니하고 산 넘어 산

넘어 산 넘어 저 멀리 있다더라.’고 노래했습니다. 결국 인간은 행복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탄식하

지만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행복으로 가는 길이 이미 우리 안에 와 있음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리

세이나 울법학자들보다 더 잘 살지 아니하면 행복을 찾아갈 수 없다고, 영생을 얻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세이나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지키면, 법이 곧 주님이기 때문에 법을 지키는 것이

곧 영생에 들어가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그러면 ‘난 사람 죽인 일 없으니까, 간음한 일 없으니까, 도둑질한 일 없으니까...나는 천당 가겠다

고 생각하는 사람들 있을 겁니다.

어느 부자 청년이 예수를 찾아가서 “어떻게 하면 제가 영생을 얻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세 율법을 알고 있지 않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아 그거요? 어릴 때

부터 다 지켰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그까짓 것 다 지켰습니다.”

주님이 부자 청년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가서 전 재산을

팔고 나를 따라 오너라.” 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이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었습니다.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그 청년은 결국 예수를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마음이 재산에 붙어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은 예수를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영생을 얻지 못한 거지요.

십계명을 열심히 지켜도,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주일 미사를 빠지지 않고 헌금을 내고 아침 조과

만과 기도를 잘 한다 해도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는 의문스럽다는 겁니다. 그 안에 들어가 있는

마음의 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껍데기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껍데기가 아무리

화려한들 무엇하냐는 겁니다. 위대한 성당, 위대한 제대, 위대한 성가대 노래소리,  위대한 기도소리

이런 것이 무엇이 중요하냐는 겁니다. 그것보다는 우리들의 마음이 훨씬 중요합니다. 성가를 잘

부르고 기도를 열심히 하고 성당에 열심히 나오지만, 집에 가면 마누라한테 큰소리 치고, 눈 부라

리고 위로 아래로 깔보고 내려보면 무엇합니까? 그런 사람 천당 간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열심히

도하고 성당 일에 열심이지만, 집에 가서 남편 밥도 잘 안 챙겨 주고 발도 안 닦아주면 어떻게

천당 간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자식을 사랑하면 발도 씻겨주고, 목욕도 시켜주고, 그

똥을 먹어도 냄새도 안 난다 그러더군요.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남편에게나 아내에게나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마음의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은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그냥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겉으로만 화려한 것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합니다. 안에서는 썩어가는데 회칠한 무덤으로는 거기서

영생을 얻는다 행복을 찾는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행복은 마음과 마음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다시피 지금 한인타운에서는 서로 죽고 죽이는 살인사건이 일어나서 야단

입니다. 그들은 법적인 관계 속에서는 동등했을지 모르지만 마음의 관계에서는 이미 파괴된 겁니다. 

불경에 화엄경이 있습니다. 화엄경에 ‘유심이 소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이 모든 것을 창조한다

고 말합니다. 세상의 생사화복과 길흉을 누가 만들어 내느냐? 인간의 마음이라는 겁니다. 마음 먹기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겁니다.

예수가 이 세상에 와서 가장 중요시한 게 이 마음의 법이었습니다. 마음이 죄를 범했으면 죄를 범한

것이라는 겁니다. 살인을 했더라도 마음이 살인을 하지 않았으면 살인한 것이 아니고, 살인을 하지

않았더라도 마음이 살인을 했으면 이미 살인한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생활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살인을 하고 사는가, 미워하는가. 용서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살인하지 않았다고, 거짓말하지 않았다고, 간음하지 않았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마음 속을 한번 들여

다보십시오. 미워하고 저주하고 싫어하고, 이미 마음의 자세가 살인의 경지에까지 이른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원효대사가 불교의 도를 깨치기 위해 당나라로 공부를 하러 떠났습니다. 가는 도중에 어느 날 밤 깊은

산중에 이르러 거기서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한참을 자다가 몹시 목이 말랐습니다. 그래서 손을

뻗치니 바가지가 잡혀서 보니까 그 안에 물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물을 마시니 얼마나 속이 시원해

지는지, 기분이 좋아져서 잠을 잘 잘 수 있었습니다. 아침에 깨어 일어나 보니 완전히 무덤 소굴에서

자기가 자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옆에 있는 물바가지를 보니까 물바가지가 아니라 해골바가지였습

니다. 그 해골바가지 안을 보니까 물이 남아 있었는데 그 속에 장구벌레가 있는 거예요. 밤에 그걸

모르고 먹었을 때는 얼마나 시원했는데, 일어나서 보고 나니까 어젯밤에 먹었던 물이 다 튀어나오

는 겁니다. 그때 원효가 깨닫습니다. ‘모든 게 마음이다. 밤에 목마를 때 먹은 그 물은 굉장히 달았

는데, 지금 보고 나니까 다 올라오려고 한다. 내가 왜 당나라까지 가는가?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렸다.’

그래서 당나라행을 포기하고 돌아와서 소위 대승불교를 완성한 분입니다.

그러한 마음의 자세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의 법은 세상의 법과는 다릅니다. 법은 우리를

살인자로 범법자로 만들지 모르지만 그러나 예수의 법은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늘나라로 가는 지혜는 예수가 만든 지혜이고 세상이 만든 지혜하고는 다르다는 겁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르가 우리에게 말합니다. ‘세상의 지혜는 멸망하는 지혜요, 예수가 말하는

지혜는 영생으로 가는 지혜다.’ 세상의 지혜는 글로 문구에 나타난 지혜입니다. 한때 행복복지원이라는

데가 세상을 시끄럽게 한 적이 있습니다. 부산에 있는 복지시설인데 ‘행복복지원’ 얼마나 보기 좋고

아름다운 이름입니까? 불량한 사람들 모아서 행복하게 해 준다고 생각했는데 들여다보니까 복마전

입니다. 돈 빼먹고 착취하고 학대하고. 또 ‘소쩍새 우는 마을’이라는 데도 있었어요. 얼마나 듣기

좋은 이름입니까? 소박하고 아름다운 사람만 살 것 같은 이름입니다.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빼먹고 거짓말하고 그랬습니다. 이 세상이 보는 눈하고 예수가 보는 눈하고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장자의 외물 편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송나라에 원공이란 임금이 있었는데 꿈에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서 “나는 재로라는 연못에서 살고 있었는데 양자강 수신의 명을 받고 황하 수신의 가신으로

가는 중에 여저라는 어부한테 걸려 잡힌 몸이 되었다. 그러니 네가 나를 좀 구해달라.”고 하는 것이

었습니다. 원공이 꿈에서 깨어나 이것이 무슨 꿈일까? 수신이 잡혀 있다. 현몽을 할 정도의 능력이

있는 걸 보면 거북이일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사람을 불러 “여저라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있습니다. 어부입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어부를 데려오게 하였습니다. 그를 데려오자 원공이 “네가 지난번에 나가서 이상한 걸 잡은 일이

있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 어부가 “있습니다. 흰 거북이를 잡았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것 기이하구나. 거북이를 내게 주고 가거라” 그렇게 해서 흰 거북이를 빼앗았습니다. 원공은

거북이를 놓아줄 것인가? 죽일 것인가? 고민하다가, 거북이를 가지고 점을 치면 아주 잘 맞는다는

소문을 듣고 거북이를 죽여서 껍질을 벗겨, 그것으로 점을 쳤는데 일흔 두 번 점을 쳤는데 한번도

틀리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공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거북이는 원공에게 현몽할 능력은 있어도 어리석은 여저에게 잡히는 능력밖에 안 된다. 또 일흔

두 번이나 점을 쳐서 한 번도 틀리지 않을 정도로 능력이 있었지만, 자기가 여저의 그물에 걸릴 줄은

몰랐구나.” 남의 점은 쳐 주어도 자기 점은 못 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세상 이치입니다. 열심히

벌고 잘 살고 부를 축적하고 명예를 축적하고 성취를 축적할 줄은 알지만 어리석은 여저한테 발

물릴 줄 누가 알겠느냐?" 세상의 지혜는 밝고 빛나고 멋지게 나아가는 것 같이 보이지만, 일흔 두

번이나 성공할 수 있는 수백 번이나 성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만, 결국은 껍데기를 벗기우고

사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세상이 가지고 있는 지혜입니다.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 얼마

든지 보십시오. 현명하게 계산하고 척척 나가지만 자신에게 다가올 껍데기 벗기워질 일은 자기가

모를 겁니다. 사실 세상의 지혜가 성공할 때는 훌륭해 보이지만 결국은 남의 먹이가 되고 밥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세상의 지혜 가지고는, 법적인 지혜 가지고는, 세상이 주는 성취의 지혜

가지고는, 성공의 지혜 가지고는, 진보의 지혜 가지고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훨씬 뛰어넘어

야 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갓난아기는 선생이 없어도 말을 배웁니다. 갓난아기가 엄마하고 지내면

엄마의 한국말을 배웁니다. 그러다가 학교에 가면 학교에서 하는 말-영어를 배웁니다. 누구하고

사느냐에 따라서 말이 달라집니다.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할 줄 아는 자와 살게 되면

사랑을 배우게 되고, 베풀 줄 아는 자와 살게 되면 자연스레 베푸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진정한

관계의 삶은 바로 이런 데에 있습니다.

유명한 TV배우 마이클 랜던을 아십니까? 이 사람이 하는 기가 막힌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Highway to Heaven' 천국으로 가는 고속도로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바로 마음의 법이 천국에 가게 한다는 걸 알려 줍니다. 이 사람이 19살 때 처음으로 TV쇼에 나가서 260불을 받았습니다. 그 돈

을 가지고 뭔가 멋진 것을 사고 싶어서 비버리 힐 쇼핑센터에 갔습니다.그런데 보니까 어떤 상점 앞에서

꼬마 둘이 코를 윈도우에 딱 갖다대고 붙어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더랍니다. 그 안을 보니까 장난감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걸 너무너무 사고 싶은데 돈이 없으니까 그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을 불러 “너희들 무얼 갖고 싶니?” 하고 물었습니다. 한 아이는 자동차 모델, 다른 한 아이는

비행기 모델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260불을 탈탈 털어서 그것을 사주었습니다. 물론 전혀 모르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자기가 처음으로 번 돈 260불을, 자기 것을 사기 위해 가져갔지만 결국 어린이들이

원하는 물건을 사주고 나니 그렇게 기분이 좋더라는 겁니다. 이게 천국 가는 길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사회에서 그리고 우리 안에서 해야할 일이 무엇이냐? 바로 마음으로 받아들여 주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