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종교

첫사랑

그린빌나 2006. 4. 11. 11:34
베트남 선승(禪僧) 틱낫한은 24세 때 베트남 원각사에서 한 비구니를 보는 순간 ‘신선한 미풍이 얼굴 위로 불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사랑한다는 말을 둘러 표현하느라 밤새워 그녀를 붙들고 이야기했다. 떠나보낸 그녀가 준 한 알의 약 이름을 반세기 지난 지금까지 기억한 틱낫한은 첫사랑을 수행(修行)의 바탕으로 삼아 항상 영혼을 일깨우고자 한다. ‘여러분의 첫사랑은 여전히 여기 있으며 언제나 여러분의 인생을 꾸려가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은 해방 직후 신학교 복교를 앞두고 ‘니체를 좋아하던’ 여인을 만났다. 어느날 그녀가 물었다 “나를 받아줄 수 있겠어요?” 한창 진로를 고민하던 그는 “한 여자를 완전히 사랑할 자신이 없어서 보다 많은 사람을 사랑하는 사제의 길을 택했다”고 한다. 그는 첫사랑을 보낸 뒤 1년 가까이 가슴앓이를 했다. 추기경에겐 결과적으로 한 여인의 사랑이 성직자의 길을 열어준 셈이다.


  고승(高僧) 성자(盛者)인들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첫사랑이다. 독일 빌트지(紙)가 카롤이라는 이름을 지녔던 교황 요한 바오로2세의 10대 시절 여자친구 이야기를 실었다. 폴란드 바도비체에서 카롤보다 한 해 늦게 태어난 할리나는 12세 때 학교 연극 무대에서 카롤을 만났다. 데뷔 무대인 소포클레스 비극 ‘안티고네’에서 할리나는 안티고네를, 카롤은 연인 하이몬을 연기했다. 둘이 연극 주인공을 도맡으면서 할리나는 ‘훤칠한 미남에 목소리도 멋진’ 카롤에 대한 사랑을 키웠다.


  둘은 크라코프대 폴란드문학과에서도 함께 진학했다. 나치가 침략하자 카롤은 사제의 길로 떠났다. 훗날 폴란드 인기배우가 된 할리나가 바티칸을 찾아갔다. 교황의 일반 접견 시간에 군중 속에서 고향 마을 “바도비체”를 외쳤다. 교황은 반응이 없었다. 실망한 그녀에게 리무진이 왔다. 교황의 아침식사 초대였다. 교황은 그녀의 첫 배역을 기억해 “할리나 안티고네”라고 부르며 얼굴을 쓰다듬었다고 한다.

 

  첫사랑은 순수의 표상이다. 거기에 계산도 실리도 없다. 첫사랑을 잊을 수 없는 것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기억하고 가슴에 묻기 때문이다. 첫사랑의 맑은 정신을 맛보지 못했거나 첫사랑의 기억을 너무 쉽게 잊는 사람은 혼탁한 세상에 물들기도 쉽다. 르네상스의 문을 연 단테나 페트라르카도 사랑하는 여인을 얻었다면 시를 쓰지 못했을 것이다. 카롤 보이티야가 첫사랑을 이뤘다면 세계는 요한 바오로 2세를 맞고 보내지 못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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