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려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 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로 눈꼽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쫓아가겠네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며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오겠네 그렇게 한두 십 년 놓아 보내고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니나 서넛 슬어놓겠네 슬어놓고
나 무능하겠네 젊은 그 여자 혼자 잉잉거릴 뿐 갈 곳도 없지 아이들은 오소리 새끼처럼 천하게 자라고 굴속같이 어두운
토방에 팔 괴고 누워 나 부연 들창 틈서리 푸설거리는 마른 눈이나 내다보겠네 쓴 담배나 뻑뻑 빨면서 또 한 세월 보내겠네
그 여자 허리 굵어지고 울음조차 잦아들고 눈에는 파랗게 불이 올 때쯤 나 덜컥 몹쓸 병 들어 시렁 밑에 자리 보겠네
말리는 술도 숨겨놓고 질기게 마시겠네 몇 해고 애를 먹어 여자 머리 반쯤 셀 때 마침내 나 먼저 숨을 놓으면 그
여자 이제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리 나 피우던 쓴 담배 따라 피우며 못 마시던 술도 배우리 욕도 배우리
이만하면 제법
속절없는 사랑 하나 안 되겠는가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 김명인 시인의 「너와집 한 채」가운데 한 구절. 이
시는 「너와집 한 채」로부터 운을 빌려왔다.
김사인 시인의 시다. 이 시의 제목은 김명인 시인의 「너와집 한 채」의 한
구절이다. 나도 그 구절 앞에서 가슴이 멘 적이 있다. 무엇에 대해 좋아하는 느낌을 공유하는 사람을 만나면 술부터 한 잔 따르고 싶어진다.
김사인 시인이 그렇다. 이십여 년 전, 어느 깊은 밤에 그이와 우연히 만났을 때, 백석을 좋아한다는 말 하나로 그 밤이 즐거운 적이 있었다.
인생을 탕진한다는 말, 이 아름다운 퇴폐와 무능력의 유혹을 한번쯤 꿈꿔보지 않은 사내가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대책 없이 늙어가는 일은 시에서나
가능한 일인가?
- 안도현의 아침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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