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아마 1988년
여름쯤일 것이다. 나는 그 당시 전북 익산에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기형도 시인한테서 전화가 왔다. 취재와 여행을 겸해서 광주에 갈 계획이
있는데 가는 길에 익산에 들르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소주 한 잔 같이 할 생각으로 그를 기다렸지만 그는 온다간다 말도 없이 그 이듬해 3월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리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이 곧 나왔다. 김현 선생은 시집 해설에서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고 썼다. 그런데 그 명명과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시가 '엄마 걱정'이 아닌가 싶다. 아닌게 아니라 이 슬프고도 따뜻한
시는 시집의 맨 끝에 외롭게, 그러나 당당하게 매달려 있다. 마치 맨 마지막에 흘리는 한 방울의 말간 눈물처럼.
이 시에서 서로를
밀어내거나 당기면서 대응하는 이미지들이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을 살펴보면 시가 훨씬 재미있을 것이다. 열무-시든 해, 시장에 간 엄마-방에 남은
나, 천천히 하는 숙제-고요히 내리는 빗소리, 발소리-빗소리, 빗물-눈물, 먼 옛날-지금, 뜨거운 눈시울-차가운 윗목 등의 이미지는 시를 맛있게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 엄마를 기다리는 어린 기형도의 깊고 맑은 눈이 그리워진다.
- 안도현의 아침엽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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