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이야기

담보는 양심 - 노벨평화상

그린빌나 2006. 10. 14. 08:28

"유누스 “담보는 ‘양심’… 돈 생기면 갚으시오”"


[동아일보]

거리는 굶어죽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더럽고 낡은 집들에는 파리 떼가 우글거렸다.

1970년대 중반 방글라데시. 자연재해와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희망은 없어 보였다.

하루 종일 쭈그린 자세로 대나무 의자를 만들어 팔아 봤자 하루 벌이는 50페이샤(약 20원). 재료 구입비 200원이 없어 고리대금업자에게 매이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담보할 것이 없는 빈민들에게 은행 대출이란 결코 허락되지 않았다.

이들을 보며 무하마드 유누스 박사는 외쳤다.

“가난한 자들에게도 신용을 누릴 권리가 있다.”

13일 노벨 평화상 공동수상자인 유누스 박사와 그라민은행의 활동은 이렇게 시작됐다.

금 세공인의 아들로 유복하게 자란 유누스 씨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방글라데시 치타공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1974년 대홍수로 10만 명이 아사한 비극은 젊은 경제학자를 번민에 빠뜨렸다. 고민은 ‘적선이 아닌 자활’의 모색으로 이어졌다.

치타공대 인근의 조브라 마을을 거듭 방문해 연구한 끝에 27달러만 있으면 이 마을 주민들이 소규모 자영업을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42명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돈이 생기면 갚으라”고만 했다. 1976년에는 이른바 무담보 소액대출(마이크로 크레디트·Micro Credit)을 해주는 그라민은행을 설립했다.

‘마을’이라는 뜻의 그라민은행 운영 방식은 독특했다. 초기 대출자격은 재산이 없는 가난한 사람에게 한정됐다.

대출받는 데 보증이나 관련 서류를 요구하지 않았고, 돈을 못 갚는다고 해서 법적 책임을 묻지도 않았다. 대출금이 정해진 시간에 상환되지 않으면 ‘융통성 있는 대출’로 전환시켜 특별 관리했다. 3년이 지나도 못 갚으면 그대로 청산시켰다.

다른 은행들은 이 위험한 영업방식을 비웃었다. 그러나 유누스 총재는 대출자들의 경제적 자립을 독려하는 방식으로 마이크로 크레디트를 밀어붙였다. 5명으로 조를 짜야 대출이 가능하도록 규정해 서로가 신용을 관리 감독하도록 했다. 대출자들은 은행이 실시하는 다양한 경제 및 문화 프로그램에 의무적으로 참석해 각종 교육을 받았다.

1983년 정식 법인으로 인정받은 그라민은행은 이후 단 세 번을 제외하고는 매년 저축과 이자만으로 운영되는 무차입 경영을 이어오고 있다. 대출금 상환율은 98%. 이자율은 최대 12%로 다른 은행보다 높아 저축도 몰린다. 경제 자립에 성공한 대출자들이 다시 예금을 하는 선순환도 궤도를 탔다.

그라민은행은 이제 방글라데시 전국의 2185개 지점에서 1만8151명의 직원을 거느린 대형 은행으로 성장했다. 2005년 7월부터 올해 6월까지 1년간 대출 총액만 6억8900만 달러에 이른다. 지난해 수익은 1500만 달러. 모든 이익은 자연재해를 관리하는 재활기금에 들어간다.

여성 대출자가 전체의 96%에 이르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여성이 남성보다 신용도가 높다는 판단 아래 적극적으로 대출해 준 결과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족관계에도 놀랄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경제력을 쥔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크게 높아진 것.

그라민은행의 운영 방식은 1980년대 중반 빌 클린턴 당시 미국 아칸소 주지사의 요청에 따라 미국에 전파된 것을 시작으로 오늘날 전 세계 52개국에서 시행되고 있다. 빈곤퇴치의 열쇠로 여러 국제기구와 사회단체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연구 대상이 됐다.

유누스 총재는 노벨 평화상 수상 소식을 듣고 “빈곤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기뻐했다. “그 꿈을 이루는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말과 함께.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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