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

시골학교 ‘논술 반란’

그린빌나 2006. 10. 17. 15:03

시골학교 ‘논술 반란’

[조선일보 김남인기자]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분진중학교. 주변이 온통 논이고 인근에 서점이나 논술 학원 하나 없다. 전교생 130명, 한 학년당 2학급뿐인 이 조그마한 학교에서 지난 9일 어마어마한 경사가 났다. 경기도 교육청이 도내 중·고교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제1회 경기도 중등논술 능력평가’에서 3학년 김미현양이 ‘논술왕’(최우수상)이 된 것이다. 심사위원들이 뽑고 나서 ‘이런 시골학교에서 뭘 가르치기에…’ 하는 의심이 덜컥 들어 학교로 확인전화를 했을 정도였다.

주변에 변변한 서점 하나 없어 애들에게 책이나 실컷 읽혀 보자고… 40세 동갑 교사2명 도서관 만들고 독서퀴즈대회 열고 ‘생각노트’지도하고 그랬더니 글쎄…

“다들 농사짓는 집들이라 형편이 넉넉지 못해요. 주변엔 변변한 서점 하나 없으니 애들에게 책이나 실컷 읽혀 보자 싶어 도서관부터 만들었습니다.” 40세 동갑인 국어 담당 최희도·유재권 두 교사가 작심하고 앞장서 도서관을 만든 게 3년 전이다.

서고(書庫)에서 누렇게 변해버린 전집을 버리고 신간으로 5000권을 추렸다. 도 교육청에 사정해 받은 예산 대부분을 책 사는 데 쓰고도 빠듯한 학교 운영비를 쪼개 매년 1000권의 책을 샀다. 두 교사는 시간이 날 때마다 도서관으로 달려가 책 대출 업무를 맡았다. “사서(司書) 인건비면 책이 몇 권이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두 교사의 ‘극성’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독서 목표량제를 정해 3년간 100권을 읽은 학생에게 상을 줬다. 매월 독서 퀴즈대회도 열었다. 만화책만 집으려는 아이들이 많다 보니 역사·사회서적 책갈피에 문화상품권을 슬쩍 끼워 넣는 기지도 발휘했다. 최 교사는 “학교가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은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었다”며 “책을 읽고 나니 글쓰기 지도가 훨씬 쉬워졌다”고 말했다.



분진중학교 글쓰기 교육은 올해로 10년째. 논술 얘기만 꺼내도 얼굴이 굳어지는 학생들을 위해서는 ‘생각노트’라는 아이디어도 냈다. “아이들이 읽은 책이나 경험을 토대로 ‘생각노트’에 자유롭게 글을 쓰도록 했어요. 영상 세대라 그런지 그림도 그리고 사진도 붙이면서 재미있어 하더군요.”

130명 전교생의 생각노트를 첨삭지도해주는 건 두 교사의 몫이다. 맞춤법을 바로잡아주는 건 기본이고 빨간 펜으로 밑줄까지 쳐가며 글의 전개방식을 고쳐주고 번뜩이는 창의성에는 하트 모양을 그려주며 칭찬했다.

글에 재미를 붙인 아이들이 하루에도 여러 건의 글을 써내려 가는 날이면 교사들은 집까지 수십 권의 생각노트를 싸 들고 간다. ‘~하세여’를 표준어로 알던 아이들이 창작 시까지 술술 써내려 가는 걸 볼 때마다 힘들어도 첨삭만큼은 그만둘 수 없었다.

논술능력 평가에서 최우수상을 받는 김미현양은 “논술 주제가 나왔을 때 학교에서 써내려 간 생각노트의 글귀와 선생님의 첨삭이 떠올라 활용했다”며 “여기에 매일 읽는 조선일보 사설이 문장력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첫 직장인 이 학교에서 10년째를 맞는 두 교사가 아이들 읽기·쓰기 교육에 매달리는 이유는 논술명문으로 이름을 내기 위해서도, 아이들의 대입을 위해서도 아니다. 아이들을 도시로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다.

“공부 좀 잘한다 싶은 아이들은 큰 도시 중학교로 갑니다. 학부모들도 시골학교에서 얼마나 가르치겠느냐고 생각하겠죠. 힘이 빠집니다. 그래서 오기로 시작한 읽기·쓰기 교육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아이들이 ‘물 만난 고기’처럼 좋아하니. 할 수 없죠. 우리가 늙어서 팔에 힘이 다 빠질 때까지 첨삭해주는 수밖에. 허허허….”

(김남인기자 kni@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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