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연의 아침엽서

서로 적막하다고

그린빌나 2006. 6. 12. 10:46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김종삼 시인의 시 '墨畵'다. 이 시의 앞 두 줄을 이렇게 바꾸어 읽어본다.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가 손을 얹었다

피동접미사 ‘히’를 빼고 나면 시의 호흡이 별안간 빨라진다. 할머니의 손길이 소 목덜미까지 가 닿는 시간도 빨라진다. 그렇게 되면 소를 쓰다듬는 할머니 손길의 경건함도 지긋한 사랑의 느낌도 사라지고 만다. 시를 망치는 순간이다.
능동적인 생각과 행동만이 우대 받는 세상을 우리는 통과해왔다. 느림이나 게으름 따위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악성 종양으로 알고 지냈다. 학교의 선생도 집안의 부모도 우리에게 좀더 빨리, 좀더 높은 곳으로 가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래야만 행복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지금, 소 목덜미에 손을 얹는 할머니는 얼마나 낮은 곳에 살고 있는가. 우리는 할머니가 얼마나 천천히 부엌에서 걸어나왔는지, 얼마나 느리게 소한테 여물을 갖다 주었는지, 소가 여물을 우물거리는 동안 얼마나 찬찬히 소를 들여다보고 있었는지 다 안다. 그리고 소와 함께 무엇을 하며 하루를 보냈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저녁 무렵, 할머니에게 이미 소는 집에서 기르는 가축이 아니다. 서로의 아픔과 외로움을 들여다볼 줄 알고, 서로를 쓰다듬어줄 수 있는 동병상련의 심정이 여섯 줄의 짧은 시에 가득 차 있다. 게다가 행간과 행간 사이의 무한한 여백, 눈짓으로 대신하는 말없음, 쉼표의 적절한 역할도 시를 그윽하게 만드는 데 한몫을 하고 있다. 김종삼의 시가 아름다운 것은 이렇게 세상 만물의 관계를 여백으로 이어주고, 여백으로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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