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

풀한테 지다

그린빌나 2006. 7. 21. 17:12
풀한테 지다
내 작업실 부근에는 묵정밭이 여러 군데 있다. 몇 해 전, 나는 그 노는 밭들을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어서 한 뙈기 갈아먹어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거기에다가 봄부터 이것저것 참 많이도 심었다. 고추 150주, 토마토 20주, 가지 20주 외에 상추, 호박, 쑥갓, 옥수수, 파, 배추, 부추, 토란 등을 며칠 동안 아내하고 같이 심었다.
어린 모종을 심은 뒤에는 물을 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고추 모들이 허리를 빳빳이 세우고 뿌리 내리기에 성공했다는 신호를 곧바로 보내왔다. 나는 신이 났다. 그런데 여름이 되어 비가 자주 내리면서 밭고랑에 풀들이 마구 돋아나기 시작했다. 이틀에 한 번 꼴로 짬이 날 때마다 들러 뽑아내도 풀들은 쑥쑥 고개를 내밀었다. 여뀌, 개망초, 질경이, 참비름, 개비름, 강아지풀, 칡...... 그리고 이름도 모를 풀들이 쉴 틈도 주지 않고 자라났다. 동네 어른들이 둘러보고는 반드시 제초제를 한두 번 쳐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하지만 농약의 폐해도 폐해려니와 이까짓 풀 정도야 하는 심정으로 나는 풀들하고 맞붙어 볼 참이었다.
그러다가 나는 갑작스레 망했다. 8월 중순쯤이었을 것이다. 원고가 밀려서 일 주일 가까이 고추밭을 둘러보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가보지 못한 사이에 고랑마다 풀들이 엄청나게 자라 있었던 것이다. 멀리서 보면 고추밭인지 풀밭인지 분간도 못할 정도였다. 내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풀들이 눈치를 챈 게 분명했다.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손으로 뽑기에는 때가 늦어 낫으로 베어내야 할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결국 나는 풀과의 전쟁에 손을 들었고, 나의 농사는 그 첫 해에 참담하게 실패를 하고 말았다. 나는 풀한테 지고, 풀은 나를 이겼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풀한테 겁도 없이 덤벼들어 전쟁을 건 것은 나였다. 풀의 입장에서 보면 나의 도전이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을 것이다. 어설프게 경작을 한다는 이유로 그들의 생존의 근거지를 빼앗은 것도 나요, 풀이라는 한 생명체를 거리낌없이 밟고 죽인 것도 나였기 때문이다. 대지의 주인은 풀이지 인간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풀한테 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등록일 : 2006.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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